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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짧게 말하기

아침이면 아침마다 생선 *아지 사려~ 하는 생선장사 구성진 목소리가 담장 밖에서 울리는 곳. 서울 성북구 수유리 수유동에 살면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장군의 수염을 읽었다. 수유리 장미원 근처에 보건탕이라는 대중탕이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 4.19 기념탑이 있었다. 당신과 나와 이어령의 벌거벗은 청춘이었다. 새파랗게 젊으신 어머니는 짭짤한 아지 조림을 자주 하셨다. 신성일이 내 動物腦의 영웅이었고 이어령이 내 人間腦의 지도교수 역할을 맡은 격이다. 내 뇌리에서 생선 아지 비린내가 풀풀 났다. 2002년 4월 어느 날 맨해튼에서 이어령 선생이 제한된 숫자의 관객들에게 무슨 담론을 펼쳤다. 연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좀 잘난 척하고 싶었지. 정신과에서 말하는 transitional space..

2022.03.04

|詩| 개구리 비

천둥이 울렸어/ 하늘을 덮고 있던 솜이불이 젖혀진다/ 개구리들이 수없이 떨어지는 검푸른 땅/ 팔 다리가 Y字로 45º 90º로 펼쳐지더니/ 네모 반듯한 방패연이 약간씩 흔들리는 모습/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얇은 뱃가죽을 스치는 더운 기류를 타고/ 비단실비가 쏟아지는 거야/ 개구리들이 수직으로 다이빙하는 하늘을 본다 배수가 잘 되는 곳에서 쑥부쟁이가 잘 자란대/ 낙동강 근처 논두렁 미꾸라지들이 똬리를 틀고 있어/ 아득한 화음/ 한사코 물뭍동물 몸통에 매달리려는 여린 팔 다리 소리/ 맞받아치는 검푸른 땅/ 6시 5분/ 어디 그럴 리가 있겠어 하며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우리를 쾅쾅 강타하는 저 개구리 떼거지들을 봐봐 시작 노트: 1999년에 29살 나이의 Paul Th..

2022.02.28

|詩| 봄이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꿈에 등장한다 봄이면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어디선지 많이 본 듯한 눈매 나른한 봄밤 날렵한 몸매, 흩날리는 꽃말 *mezzo piano 진폭, 가여운 진폭 살에 사무치는 꽃말, 최초의 꽃말 한참을 한껏 편안히 드러누운 자세였다가 당신이 벌떡 일어나 앉는 니은字 모양으로 날生鮮 펄떡거리는 꿈결 봄이 일구는 생생한 집터, 싱싱한 生時 *조금 여리게 하는 연주 기법, 음악 용어 시작 노트: 매해 봄이 오면 어김없이 꿈의 분량이 많아진다. 꿈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해서 내게 말을 붙이기도 한다. 좀 불안할 때도 있다. 대화 내용은 무의미하거나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대화를 하다가 일방적으로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깨어나면 꿈이다. © 서 량..

2022.02.19

|詩| Deep Scan

뚱뚱한 미국인이 전하는 TV 일기예보 언어의 속도, 언어의 마술 폭설의 요술이 덮치는 뉴욕 1월 마지막 주말 포스트모더니즘 미국 지도 앞에서 뚱뚱한 미국인이 말한다 “여론조사, 여론조사” 그는 다시 말한다 “兩者토론, 兩者토론” 그는 내 이중언어를 급히 해체하고 조립한다 짐승이 우는 소리, 폭설이 앞뜰에 군림하고 있어 기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무서워요 바이러스 제거 소프트웨어가 하드 드라이브를 deep scan 하는 동안 아마존에서 하이킹 슈즈 한 켤레를 주문해야겠어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뒷꿈치에 주홍빛 티눈이 박힌 투박한 카키색 가죽구두를 시작 노트: 언젠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박물관에 진열될지도 몰라. 초현실주의처럼 말이지. 꿈을 토대로 한 예술품을 창작할 수 있지만 '꿈自體, dream-in-itsel..

2022.01.29

|詩| 양말, 사라지다

보물섬을 찾아 헤맨다 18세기 중엽 키다리 외다리 롱 존 실버가 모니터 화면에서 감쪽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데 그가 어느 날 아래층 금성 세탁기에서 불쑥 홀로그램으로 솟아오를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파란 영국 해군 제복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모자를 쓴 채 아무 데나 무단출입을 하는 그가 어깨에 앵무새 날개를 펄럭이면서 닥터 리브시, Dr. Livesey*가 갑판에서 선장을 쿨하게 꾸짖는다 지금껏 아무 탈 없이 운행되는 아래층 금성 세탁기가 막말 잘 하기로 소문난 양말 한 짝을 꼬드겼다는데 때로는 짝이 다른 양말들이 한꺼번에 아담한 목선을 타고 야반도주로 떠난다는 거예요 거세게 출렁이는,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아! 글쎄, 희한한 금궤가 숨어있는 보물섬을 찾아서 * Long John Silver, Jim Ha..

2022.01.20

|詩| 발랄한 구름

구름이 내 서재 창문을 두드린다 구름 당신 神의 DNA 다 한통속 DNA 구름이 지 멋대로 행동해요 gloomy 구름 밤새 함박눈 내린 다음날 맑은 대낮에 증세가 더 심해진대 조짐이 좋아 아주 *아바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위덩더둥셩, 하는 구름은 독립개체 당신도 神도 말짱 독립개체 구름 배후에는 어느 놈이 있느냐 말해 다오 말해 다오, 음흠 *고려가요 작자미상 사모곡(思母曲)의 한 구절 시작 노트: 눈 온 다음날은 마음이 느슨해진다. 눈 온 다음날은 생각이 좀 과학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구름과 神의 DNA를 상상하는 경우도 눈 온 다음날이다. 그러다가 고려가요도 떠오르고 말해 다오~ 하는 1979년 히트곡 김트리오의 '연안부두'가 떠오른다. 위덩더둥셩, 말해 다오, 음흠~♪ ♫ © 서 량 2022.01.08

2022.01.16

|詩| 새벽 커피 컵

환한 전등 아래 다 마신 커피 어둑한 커피 컵 속 대천해수욕장은 내 영혼의 어린이 놀이터 여럿이 우와 소리치며 타는 커다란 파도 파라솔 모래사장 하늘색 줄무늬 물색 커피 컵 옆 회색 가정용 전자혈압계 *LCD 표시판 널브러진 뭉게구름 하루에도 몇 번씩 눈감고 찾아가는 곳 파도 소리 우람한 햇살 아래 해맑은 대천해수욕장은 *Liquid Crystal Display - 액정(液晶) 표시장치 시작 노트: 새벽마다 혈압을 재는 습관이 생겼다.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서 이거 참 재미있는데, 하는 일정이다. 혈압이 좀 높다 싶으면 10초, 20초 눈을 감고 11살 때 처음 갔던 대천해수욕장을 눈에 생생하게 그리고 나서 다시 재면 혈압수치가 10, 20, 드물게는 30 정도 뚝 떨어진다...

2022.01.06

|詩| 괘종시계 호랑이 얼굴이

사람 키보다 큰 괘종시계가 벽에 등을 대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종아리에 쥐가 나네 내분비학을 전공한 대학 후배 얼굴이 떠올랐어 근육이 뻣뻣해 밑도 끝도 없이 터지는 일,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마음이에요 흐리멍덩한 메모리, *Tyger Tyger, 호랑이가 내 쪽으로 쓱 한 발 다가온다 줄무늬 줄줄이 물결치는 色相, 호랑이 몸이 일그러진다 무너지는 겨울 파도, 호랑이 얼굴이 괭괭 울린다 당신이 망가지고 있어 내 얼굴이 괭괭 울린다 두 발로 서면 몸집이 사람 키보다 큰 호랑이가 푹푹 깊은 숨을 몰아쉬는데 나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신비주의자, 선지자로 불리는 영국 시인 William Blake (1757~1827)의 대표작 “The Tyger”의 첫 구절. 시작 노트: 올해가 호랑이 해라는 걸 생각할 틈이..

2022.01.02

|詩| 간이인간(簡易人間)

한밤중에 암행어사가 출두한다 암행어사가 탄 말갈기가 찬 바람에 휘날린다 암행어사가 말없이 어둠을 쏘아본다 어둠에 구멍이 나고 바람이 멎는다 애시당초 암행어사의 당찬 언어는 바람을 수평으로 가르는 임무를 띠었다는 소문이었어 간이역에 역장이 존재하지 않아 간이역에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환기가 좋을 뿐더러 채광도 좋아 간이역은 단순하다는 이유로만 존재하지 당신은 간소하고 알기 쉬운 사람 샹들리에 화려한 레스토랑이 크게 내키지 않아요 가까운 간이식당에 가서 언어의 시장끼를 달래야겠어 메뉴가 한둘 밖에 없는 사람,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 꿈 담장 밖에 서있는 당신은 위풍당당한 암행어사다 © 서 량 2021.12.0

2021.12.04

|詩| 아령과 비둘기

현미경 망원경 다 소용 없다 아령을 스승으로 삼기로 했어 아령이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꿈에 나왔지 나는 응당 그와 관계를 형성한다 흉허물 없이 다 터놓고 지내는 관계 함부로 난잡한 말을 주고 받아도 괜찮은 그런 아령의 흉터에 심하게 신경을 쓴다 아령은 내게 막강한 권리를 부여한다 아령이 나를 서서히 장악한다 아령 양 가슴에 이윽고 튀어나오는 알통 회색 바탕에 무지개 빛 맴도는 사나운 비둘기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가는 순간에 바람결 아령 옆구리에 빨갛게 매달리는 딸기 하나 히말라야 정상에서 행하는 티베트 불교식 수행 잘라진 팔 얼굴 없는 남자의 토르소 아령은 초지일관이예요 입을 벙긋 벌린 생선 몇 마리가 슬금슬금 헤엄치는 하늘 속으로 당신이 서슴없이 © 서 량 2021.11.23

2021.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