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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신(神)을 폭행한 사람들 여럿 문 쪽을 향하여 엘리베이터 안에 단정하게 서 있다 당신은 빨리 흥분한다 초록이 극명하게 투명해지는 순간 두 남녀가 키스 하는 장면이 나온다 피아노 반주에 첼로가 독주하는 굵은 멜로디 배경음악 내가 살지 않은 내 삶에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 의무의 족쇄를 벗어나는 최면술의 꽃이 피어난다 몸이 통통한 안나 오와 목이 긴 루 살로메가 풀밭을 걷고 있어요 눈물은 감정 완화 감정 빚의 탕감, 눈물은 달콤해 정말 이제 니체의 눈물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When Nietzsche Wept: 현 스탠포드 명예교수인 실존주의 정신과의사 Irvin Yalom (1931~ )의 소설. 같은 제목으로 2007년에 영화가 나옴. Nietzsche, Breuer, Freud, Lou Salome..

2021.11.18

|詩| 인터뷰 시간

내가 원하는 건 청명한 가을 하늘, 그런 투명성 과학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어요 당신 말씨는 신화(神話) 오래된 스토리텔링 진화론에는 음험한 구석이 있어 어딘지 내가 원하는 건 가까운 도로공사 굴착기 소리 호흡이 잘 맞는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악장 찌뿌듯한 빌딩 사이로 종이 테이프 쪼가리 우수수 떨어지는 퍼레이드 진행 중 중절모자 쓴 두 사내가 총질을 해요 한쪽 사내의 무릎이 꺾이면서 픽 쓰러진다, 그런 흑백영화를 떠나서 나는 당신의 질문을 시방 모양빠지게 맞받아치는 중 © 서 량 2021.11.11

2021.11.12

|詩| 목소리 플러스

침샘에 천수(天水)가 마르지 않는 거 아마 유전일 거야 목소리가 정말 맑아 진짜 입 속 뒤쪽 캄캄한 동굴에서 조심스레 울대를 조율하는 발성법에 있는 거지 젖은 목젖 조그만 목젖이 울리고 있어 창밖에서 새가 찌찌 쑤쑤 노래한다 첫 소리만 듣고도 얼른 알아차리는 거지 뜨거운 기운 플러스 알파 늦가을 깊숙이 사무치는 목관악기 당신 청신한 목소리가 첨부 문서 파일을 죽기 살기로 압도하는 매 순간마다 ©서 량 2021.11.09

2021.11.09

|詩| 이거

포도를 먹고 있어 입에 침이 흥건하게 옛날을 씹듯 배경음악은 하하, 커다란 솜구름이 몸을 뒤척이며 코고는 소리 같기도 아니 이건 완전 업 비트 재즈 리듬이야 수영 선수가 휙휙 팔을 휘젓는 물 속에서 매번 푸푸, 고개를 쳐들 듯, 아니면 이 포도주잔 밑바닥에 달빛 출렁이는 밀물로 파고드는 비브라토가 심한 당신의 콧노래야 에코 흥건한 교회화음 물살이 내 이마를 가벼이 때리는 연신 따스한 소리, 이거 © 서 량 2012.12.19 – 2021.11.07

2021.11.07

|詩| 대충 하고 싶은 말

파도가 넘실대면 머리에 빨강 노랑 초록 풍선을 얹은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아, 파도를 타요 꿈이 넘실거려요 자꾸만 이제 네이비 블루 아늑한 아다지오 템포 엄청난 오징어가 헤엄치는 바다 밑 세상 누군가 속삭인다 – Yes, it is what it is! 응, 그건 있는 그대로야! 오징어가 먹물을 뿜는 바다 밑 세상 온갖 생물들이 움직이고 있어 침착하게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그들이 코끼리 귀만 한 날개를 펄럭이며 지금 바다를 탈출하고 있다는 거 © 서 량 2021.10.07

2021.10.07

|詩| 거꾸로 보기

하늘이 좋아서 하늘을 거꾸로 보고 싶었어 철봉에 오금을 걸고 매달려 몸을 흔들다가 첨벙, 하늘로 뛰어들었지 당신의 신은 지금 어디쯤에서 목욕을 하고 있나 옛날 금관악기 소리 들린다 물소리, 신의 소리, 중세 음악, 하늘 속 깊이 깊이 거꾸로 치솟는 저 짙은 옥색의 파동! 적외선 경보 시스템이 작동 중 천기를 누설하려나, 첩보원 몇명 어슬렁거리네 새까만 동공을 감싸주는 홍채가 마구 진동하는 당신 꿈 끝부분에 꿋꿋하게 누워있어 나는 하늘을 발 아래 두고 아, 발 아래 두고 © 서 량 2021.09.26

2021.09.26

|詩| 시론토론 --문정희에게

일년 좀 넘어서 뉴욕 북쪽으로 차를 몰면서 옆 자리에 앉은 정희에게 나는 내 시만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남의 시는 마음에 차지 않으니 어쩌면 좋지? 하며 말했다가 얼른 후회한다. 빨강 노랑 나뭇잎들이 차창에 마구 달려드는 가을 하늘 곁으로 정희가 깜짝 놀라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본다. 위험천만한 발상! 이 사람아, 설사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해도 그렇게 함부로 발설하는 게 아니지. 일년 좀 넘는 동안을 한 달에도 몇 번씩 낯을 붉히면서 왜 내가 그런 교만한 말을 했나 하며 고민한다. 하다못해 저 무시무시한 무의식에 도사린 어떤 무슨 뾰족한 이유라도 있겠지. 엄청난 발언 뒤에는 늘 구질구질한 이유가 있으니까. 오늘은 내 서재 창 밖 나뭇잎들이 한 70 내지 80프로가 다 떨어지고 거의 앙..

2021.09.14

|詩| 아, 헬리콥터 떴다

잿빛 담요로 덮인 먼 곳 구름 쪽으로 날아가는 강철 저 덜컹거리는, 귀에 익숙한 소리 도무지 없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척 오래 기다리던 꿈, 옛 사랑 나는 원시의 아프리카 불타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잠자리다 두 팔을 양껏 벌리면 한쪽 날개가 최소 스쿨 버스 한 대 길이로 창공을 누비는 날짐승이지 정말? 응, 딱 그 정도 크기! 몸 전체 어디에도 철제의 프로펠러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야 공룡시대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앉아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당신을 찾아가는 © 서 량 2021.09.01

2021.09.01

|詩| 시간이여, 안녕

애써 외면을 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빛처럼 가랑비처럼 당신은 나를 직면합니다 편안하고 아랑곳 없는 기색입니다 생각해 보면 굳이 꺼림직하다거나 할 것 없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어젯밤 황금햇살이 우박같이 쏟아지는 꿈 속에서 철부지 강아지로 마냥 뛰어다녔습니다 놀다가 지쳐서 아무 풀섶에게라도 코를 대고 킁킁대면 들쩍지근한 시간의 냄새가 물씬했습니다 당신이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나는 어젯밤 꼬리를 살래살래 흔드는 조그만 강아지였습니다 © 서 량 2007.09.16 - 2021.08.04

2021.08.04

|詩| 핑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원칙을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청포도, 따끔한 불개미같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요 우주가 물속에서 아가미로 숨쉬는 거대한 잉어라는 생각을 했지 반짝이는 별들은 그 잉어가 힘주어 살포한 알의 포말이다 우주의 산란기에 앞뜰 돌멩이들이 살을 맞대고 접속 중 엉덩이 토실토실한 흰 토끼 하나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풀밭 그늘에 에너지, 나긋나긋한 에너지가 밀려오고 있네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으면서 © 서 량 2007.08.23 - 2021.08.02

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