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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7도 화음에 대한 논란

귀뚜라미 두 마리 소리 내는 피아노곡. 띳띳띠 띳띳띠 Chopsticks 시작 부분이 귀에 쫌 거슬린다. F, G 흰 건반을 가까이 가지런히 같이 때린다. 겨우 한 음정 차이로 나란히 누워 있는 중년남녀처럼. 7도화음이 5월 함박꽃만큼 화려하다고 당신이 말했던가요. 밤하늘 별들도 7도화음인가요 피아노 複音보다 취주악기 *아르페지오는 어때요. 아뿔싸, 그 대신 찌릿찌릿한 同時性일랑 전혀 없다는 거죠. *arpeggio: 화음을 이루는 여러 음정을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또는 오르내리며 연주하는 기법 시작 노트: 피아노 곡 Chopsticks 시작은 G7 코드다. dominant note보다 한음 아래 음은 자꾸 dominant note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재즈에서는 안 그렇다. 당신..

2023.02.23

|詩| 오해

밤과 낮이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태양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행여 귀머거리가 아닌가 하는데. 베어 마운틴 산허리 들쑥날쑥한 외길을 급하게 운전한다. 당신 무의식에 깊이 파인 기쁨이며 그 밑바닥을 유장하게 흘러가는 슬픔 따위를 나는 도무지 실감하지 못한다. 내 피가 많이 섞인 내 손주딸 속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데. 재작년이었는지 눈이 펑펑 내린 다음 날 내 헛헛한 목덜미를 데워주던 따스한 겨울 햇살의 의미는 또 뭐였는지. © 서 량 2007.08.20 – 2023.02.04

2023.02.23

|詩| 시계바늘이 그토록

낮 12시 10분 전쯤을 한 쪽 팔 길게 뻗쳐 버티는 시계바늘 장침이 보여주는 힘 한겨울 분홍 국화 한 송이 빛이 관통하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시계바늘이 이루는 *arpeggio 잔 파동 산지사방으로 물결치는 은하수 은싸라기 잿빛 지구 위 낮 12시 10분 전쯤에 밤 10시, 11시를 알리는 괘종소리 뎅뎅 울리네 한겨울 바람결 싸락눈이 우리는 왜, 우리는 왜, 하며 나직하게 창문을 때리는 대낮에 *아르페지오 - 분산화음, 화음을 빨리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주법 시작 노트: 싸락눈이 내린다. 싸락눈은 입춘이 지난 지열 때문인지 서재 옆 드라이브웨이에 내리자마자 이내 녹거나 바람에 날려서 아스팔트를 덮지 못한다. 국화 한 송이 꽃잎 하나하나가 싸락눈으로 둔갑한다. 국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낮인지 밤..

2023.02.22

|詩| 잘못된 詩

잘못된 詩 -- *까뮈유 끌로델에게 틈만 생기면 당신의 시는 퉁명스러워져요 갓난아기가 따로 없다니까 시를 그렇게 호락호락 들었다 놨다 하지 못하지 잘못된 책은 바꿔드립니다 아무 말이나 멋대로 하지 말아요 민들레 홀씨들이 쿵쿵 윈드쉴드에 부딪친다 충격을 누그리다시피 나도 쾅쾅 맞부딪친다 숨 몇 번 쉬는 사이에 나를 홀리는 당신 시는 완전 꿈이야 훅 불면 바람에 훨훨 날아가버리는 몸을 흔들면서 * 프랑스 조각가(1864~1943) 로댕과 한동안 협작을 함 생의 후반기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냄 시작 노트: 2020년 집에 불이 나 후 전셋집에서 살 때 우연히 “왈츠”라는 조각품을 발견했다. 조각가인 까뮈유 끌로델은 오귀스트 로댕의 애인이었다. 그들은 20년 동안 격정적인 관계였다. 그녀는 파리 근교의 정신병..

2023.02.19

|詩| 꿈이 타조, 칠면조 걸음걸이로

아다지오 템포 머리 목 한꺼번에 흔들리며 리듬 감각이 생겨난다 타조, 칠면조 머리 목이며 물음표 동작 Sicily 섬 수평선이 기우뚱거려요 잠시 정지상태 재밌지? 타조, 칠면조 여러 마리 담대한 바닷가를 건들건들 걸어간다 꿈은 참신한 날짐승입니다 저것 좀 봐! 꿈이 돌 城 위로 푸득푸득 날아가요 주홍색 파도 넘실대는 Sicily 섬 석양녘 타조, 칠면조 여러 마리 돌 城을 치고 올라 붕~ 뜨더니 © 서 량 2023.02.12 시작 노트: 의식의 흐름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재즈 리듬 감각도 그런 게 아닌가 싶지. 1920년도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초현실적 수법이 치솟는다. 뒷마당에 칠면조들이 수두룩하게 몰려 왔는데 그 중 몇 마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지붕 위로 날아가더라. 재밌지. 꿈을 꾸듯 꾸밈없는 ..

2023.02.13

|詩| 구름의 속도

커다란 구름 덩어리가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기류를 헤치고 질주하는 것을 보았다 우주탐색 로켓처럼 당신과 내 사이를 슝슝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거야 구름의 가장 무서운 습성은 과속이 잦다는 것 구름은 교통 단속을 받지 않습니다 구름은 절대로 하늘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래서 무진장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실성을 해도 누가 뭐라 탓하지 않아요 핏빛 석양을 깨물어 먹는 날짐승 공룡들이 원시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절단한다 공룡의 과속은 지구와의 결별을 위한 수단이다 구름이 시야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구름의 행적을 찾아내서 내 알뜰살뜰한 원근법 안쪽으로 끌어드릴까 하는데 총알보다 빠른 구름의 몸놀림을 맨눈으로 쫓아갈 수 있다 하는데요 커다란 구름 덩어리가 당신과 내 속을 발칵 뒤집어 놓는..

2023.01.28

|詩| 인터넷에 잡히는 꽃

솜구름 떠도는 화면 속 거무칙칙한 바위 틈에 자리잡은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에 붙잡힌 벌레잡이제비꽃이 다섯 손가락을 펼친다 진한 보랏빛 요술을 부리는 벌레잡이제비꽃, 전자파장 자욱한 인터넷에 새빨간 점박이 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잠시 후 눈물을 펑펑 쏟는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결에 짙은 안개가 깔리는 전자공간에 투사되는 당신의 심층심리 *Pinguicula vulgaris: 대한민국 북부 높은 산의 습한 바위나 늪지에 나는 여러해살이 식충 식물 시작 노트: 내 삶을 지배하는 인터넷. 어떤 때는 종일토록 인터넷을 쏘다닌다. 우연찮게 벌레잡이제비꽃을 공부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식물이라니! 말만 듣던 그런. © 서 량 2009.04.14 – 2022.12.15

2022.12.15

|詩| 북소리

고등학교 뺀드부에서 대북을 솜방망이로 쿵쿵 치던 놈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집이 실해서 아무도 그놈을 집적대지 못했다 세상 실체라는 실체는 무조건 쿵쿵 때리던 놈 눈, 비, 벼락과도 부딪치고 4분의 2박자 애절한 사랑이며 연신 때려대는 동안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했어 횃불처럼 햇살 좋은 가을 무슨 학교 행사 때 뺀드부 행진 중 전 멜로디 악기들이 그놈이 치는 운명의 북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멜로디고 나발이고 다 소용 없어 북소리, 박동하는 심장 신호 말고 실체는 없어 구름 언저리로 콩나물대가리들이 후두둑 날아가고 있지 그치 지금 32분 음표 여럿 시작 노트: 과거, 현재 구획하는 거는 부질없는 짓이다. 흐르는 강물의 상류, 하류를 분리수거할 수 없지. 내 안에 출렁이는 강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슷비슷한 미생물..

2022.12.10

|詩| 행진곡을 기다리다

광대뼈 뭉툭한 박정희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웃지 않는 얼굴로 돌아왔을 때 대한뉴스에 부는 바람 김포공항 흙바람 흑백영상을 코닥 컬러로 변조시키는 Washington Post March 행진곡이 터진다 대퇴근 힘살이 근질근질해지는 곡 육군사관학교 여드름 엉덩이 딱딱한 젊은이 울퉁불퉁한 바지 옆구리 두 손가락 너비로 꽉 재봉 된 실밥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 하며 당신이 소리쳤을 때 DMZ 하늘에서 조그만 돌덩어리들이 쏟아진다 젊은이들이 한사코 비무장지대에 몰려든다 근사한 유니폼을 입은 채 불쑥불쑥 태어난 꼬마 병정들이 골반뼈 나란히 저벅저벅 걸어가는 곡 시작 노트: 병정놀이가 전쟁이라는 말이니. 장난감 병정들이 척척 발맞추어 걸어가는 소리 들린다. 그들의 몸동작을 좌지우지하는 행진곡 멜로디가 ..

2022.12.09

|詩| 나무의 발짓

나무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가 무슨 마음인지 대충 짐작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나무 마음을 함부로 넘겨짚어서는 안 돼요 차가운 바람결 나무가 내게 손짓한다 내 나무 사랑이 함량미달이라는 뜻일지도 몰라 아까 마당에 떨어진 큰 나뭇가지를 치우러 뒷마당에 나갔다가 나무 밑둥치를 발로 툭, 툭 몇 번 찼다 살살 가볍게 아프지 않게 그리고 좀 기다렸더니 나무가 내게 꿈틀거리며 발짓을 하는 거 있지 시작 노트: 나무와 가까워지고 싶다. 나무에게 예절을 차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무를 가까이 하고 싶다. 나무와 악수를 하느니 차라리 나무 밑둥치를 발로 차는 것이 고작이지. 나무도 마찬가지 마음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틀려도 할 수 없다. © 서 량 2007.09.18 - 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