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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구름의 속도

커다란 구름 덩어리가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기류를 헤치고 질주하는 것을 보았다 우주탐색 로켓처럼 당신과 내 사이를 슝슝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거야 구름의 가장 무서운 습성은 과속이 잦다는 것 구름은 교통 단속을 받지 않습니다 구름은 절대로 하늘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래서 무진장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실성을 해도 누가 뭐라 탓하지 않아요 핏빛 석양을 깨물어 먹는 날짐승 공룡들이 원시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절단한다 공룡의 과속은 지구와의 결별을 위한 수단이다 구름이 시야에서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구름의 행적을 찾아내서 내 알뜰살뜰한 원근법 안쪽으로 끌어드릴까 하는데 총알보다 빠른 구름의 몸놀림을 맨눈으로 쫓아갈 수 있다 하는데요 커다란 구름 덩어리가 당신과 내 속을 발칵 뒤집어 놓는..

2023.01.28

|詩| 인터넷에 잡히는 꽃

솜구름 떠도는 화면 속 거무칙칙한 바위 틈에 자리잡은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에 붙잡힌 벌레잡이제비꽃이 다섯 손가락을 펼친다 진한 보랏빛 요술을 부리는 벌레잡이제비꽃, 전자파장 자욱한 인터넷에 새빨간 점박이 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간다 잠시 후 눈물을 펑펑 쏟는 벌레잡이제비꽃, 초록색 바람결에 짙은 안개가 깔리는 전자공간에 투사되는 당신의 심층심리 *Pinguicula vulgaris: 대한민국 북부 높은 산의 습한 바위나 늪지에 나는 여러해살이 식충 식물 시작 노트: 내 삶을 지배하는 인터넷. 어떤 때는 종일토록 인터넷을 쏘다닌다. 우연찮게 벌레잡이제비꽃을 공부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식물이라니! 말만 듣던 그런. © 서 량 2009.04.14 – 2022.12.15

2022.12.15

|詩| 북소리

고등학교 뺀드부에서 대북을 솜방망이로 쿵쿵 치던 놈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집이 실해서 아무도 그놈을 집적대지 못했다 세상 실체라는 실체는 무조건 쿵쿵 때리던 놈 눈, 비, 벼락과도 부딪치고 4분의 2박자 애절한 사랑이며 연신 때려대는 동안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했어 횃불처럼 햇살 좋은 가을 무슨 학교 행사 때 뺀드부 행진 중 전 멜로디 악기들이 그놈이 치는 운명의 북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멜로디고 나발이고 다 소용 없어 북소리, 박동하는 심장 신호 말고 실체는 없어 구름 언저리로 콩나물대가리들이 후두둑 날아가고 있지 그치 지금 32분 음표 여럿 시작 노트: 과거, 현재 구획하는 거는 부질없는 짓이다. 흐르는 강물의 상류, 하류를 분리수거할 수 없지. 내 안에 출렁이는 강에는 예나 지금이나 어슷비슷한 미생물..

2022.12.10

|詩| 행진곡을 기다리다

광대뼈 뭉툭한 박정희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웃지 않는 얼굴로 돌아왔을 때 대한뉴스에 부는 바람 김포공항 흙바람 흑백영상을 코닥 컬러로 변조시키는 Washington Post March 행진곡이 터진다 대퇴근 힘살이 근질근질해지는 곡 육군사관학교 여드름 엉덩이 딱딱한 젊은이 울퉁불퉁한 바지 옆구리 두 손가락 너비로 꽉 재봉 된 실밥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어, 하며 당신이 소리쳤을 때 DMZ 하늘에서 조그만 돌덩어리들이 쏟아진다 젊은이들이 한사코 비무장지대에 몰려든다 근사한 유니폼을 입은 채 불쑥불쑥 태어난 꼬마 병정들이 골반뼈 나란히 저벅저벅 걸어가는 곡 시작 노트: 병정놀이가 전쟁이라는 말이니. 장난감 병정들이 척척 발맞추어 걸어가는 소리 들린다. 그들의 몸동작을 좌지우지하는 행진곡 멜로디가 ..

2022.12.09

|詩| 나무의 발짓

나무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가 무슨 마음인지 대충 짐작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나무 마음을 함부로 넘겨짚어서는 안 돼요 차가운 바람결 나무가 내게 손짓한다 내 나무 사랑이 함량미달이라는 뜻일지도 몰라 아까 마당에 떨어진 큰 나뭇가지를 치우러 뒷마당에 나갔다가 나무 밑둥치를 발로 툭, 툭 몇 번 찼다 살살 가볍게 아프지 않게 그리고 좀 기다렸더니 나무가 내게 꿈틀거리며 발짓을 하는 거 있지 시작 노트: 나무와 가까워지고 싶다. 나무에게 예절을 차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무를 가까이 하고 싶다. 나무와 악수를 하느니 차라리 나무 밑둥치를 발로 차는 것이 고작이지. 나무도 마찬가지 마음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틀려도 할 수 없다. © 서 량 2007.09.18 - 2..

2022.12.06

|詩| 몽고반점* 옛날

꼬리뼈에 이끼 미역 냄새 물씬한 이끼 내 누추한 어릴 적 청량리 역전 언덕 위 집 눅진눅진한 석회 벽 구역질 감미로운 갓 지은 집 벽 냄새 바다 냄새 새 집 새 세상 내 집이라네 이제는 천정 높고 창문 많은 현대식 주택 사시사철 울긋불긋 무지개가 난동을 부리는 그곳 바람 부는 청량리 언덕 위 철도관사 금세 푸드득 날아갈 듯 번듯하고 쓸쓸하고 마음에 쏙 드는 집 한 채라네 *갓난아이의 엉덩이, 등, 허리 같은 곳에 멍든 것처럼 퍼렇게 되어 있는 얼룩점. 몽고 인종에게서 흔히 발견되고 다섯 살쯤 저절로 없어진다. © 서 량 2007.08.17 – 2022.12.03

2022.12.03

|詩| 눈을 크게 뜨다

눈(眼)은 야만적인 상태에 존재한다 -- *안드레 브르통 (1926) 빅뱅이 사라지자 금세 새롭게 생겨나는 샛별을 보세요 구름빛 소파에 앉아서 당신이 말한다 빨강 노랑 파랑 풍선 낯익은 얼굴들을 봐봐 빅뱅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무더운 공기 사방팔방 풀려나는 지구보다 몇 백 배 더 큰 생물 무색 무취 무미 아메바 짚신벌레 등등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 모습 어디가 야만적이지 저 샛별 어디가 야만적이지 * Andre Breton –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발표한 프랑스 정신과의사, 시인, 초현실주의의 태두 시작 노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은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쓰기에 바빠서 '의사짓'을 포기했다. 그 즈음 미국의 소아과의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꼬박꼬박 의사짓을 하면서 시시때때 처방전에 시..

2022.11.26

|詩| 바다 밑 거북이

거북이 눈, 내 아버지 눈 *Largo 템포 너울대는 양쪽 팔 유튜브 미역숲 거북이 참 크다 누구나 안다 소스라치는 열대어 새빨간 몸 흰 줄이 죽죽 간 무늬 고개를 돌리면 몸이 따라간다 갑골문자, 내 배딱지에 갑골문자 text 전혀 어렵지 않아요 자맥질 하는 거북이 이때가 때다 다 큰 어른이 양쪽 팔을 벌리고 나비야 나비야 춤을 추니까 하늘, 흐릿한 하늘에 우르르 펼쳐지는 큰 大자라니까 정말 *라르고: (음악용어)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 노트: 느리고 반복적인 음악이 흐른다. 유튜브가 바다 밑 풍경으로 나를 진정시킨다. 거북이가 화면전체를 덮는다. 여간하지 않고서는 배딱지를 보여주지 않는 거북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자리를 잘 감추는 저 거북이. © 서 량 2022.11.25

2022.11.25

|詩| 기생잠자리

웃을 때마다 뇌가 울린다 거대한 숲, 비에 젖은 접동새가 귀 기울이는 천둥 벼락, 지난 여름이 기울 때도 그랬다 새끼 손가락 반만 한 妓生잠자리 妓生잠자리 날개를 반짝이며 쏘다니는 원시의 숲에서 당신은 유튜브를 묵묵히 관람한다 공포에 질려서 마구 고함을 치고 싶어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어도 등허리에 여리디 여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신 로마신화를 슬쩍 빠져나와 속세의 숲을 유람하는 바람의 신 神이라는 당신의 아이디, 이름을 발음하기가 한참 어려운 神이 숲을 회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귀신 신, 웃을 때마다 쑥쑥 올라가는 방문통계 등뼈를 전후 좌우로 흔들면서 영영 당신이 전신을 부르르 떨다시피 시작 노트: 브들레르, 케루악, 긴즈버그, 정진규 같은 산문시인들의 고초를 생각한다. 케루악의 "On the ..

2022.11.19

|詩| 가을의 난동

심지어 캄캄한 우주 깨알만한 은하수까지 움켜쥐는 엄청난 기력입니다 떡갈나무들이 허리 굽혀 옷을 벗는다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추억, 추억 전신이 땅거미 저녁 빛, 오렌지색 황혼 빛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몸부림, 몸부림이 목숨을 거는 모습이다 슬픈 기색이 없이 눈물 따위 글썽이지 않으면서 심지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깁니다 시작 노트: 옛날에 써 두었던 시를 혼쭐나게 많이 뜯어고쳤다. 시를 쓰다 보면 그저 만만한 게 계절을 주제로 삼는 짓이다. 특히 봄이나 가을을 우려먹는다. 전에 이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이번에는 이다. 맞다, 맞다. 계절은 내게 반란을 이르키고 난동을 부린다. 그런 어려움을 섭렵하겠다고 덤벼드는 나도 참, 나다. © 서 량 2008.10.14 – 2022.11.17

2022.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