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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몽고반점* 옛날

꼬리뼈에 이끼 미역 냄새 물씬한 이끼 내 누추한 어릴 적 청량리 역전 언덕 위 집 눅진눅진한 석회 벽 구역질 감미로운 갓 지은 집 벽 냄새 바다 냄새 새 집 새 세상 내 집이라네 이제는 천정 높고 창문 많은 현대식 주택 사시사철 울긋불긋 무지개가 난동을 부리는 그곳 바람 부는 청량리 언덕 위 철도관사 금세 푸드득 날아갈 듯 번듯하고 쓸쓸하고 마음에 쏙 드는 집 한 채라네 *갓난아이의 엉덩이, 등, 허리 같은 곳에 멍든 것처럼 퍼렇게 되어 있는 얼룩점. 몽고 인종에게서 흔히 발견되고 다섯 살쯤 저절로 없어진다. © 서 량 2007.08.17 – 2022.12.03

2022.12.03

|詩| 눈을 크게 뜨다

눈(眼)은 야만적인 상태에 존재한다 -- *안드레 브르통 (1926) 빅뱅이 사라지자 금세 새롭게 생겨나는 샛별을 보세요 구름빛 소파에 앉아서 당신이 말한다 빨강 노랑 파랑 풍선 낯익은 얼굴들을 봐봐 빅뱅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무더운 공기 사방팔방 풀려나는 지구보다 몇 백 배 더 큰 생물 무색 무취 무미 아메바 짚신벌레 등등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 모습 어디가 야만적이지 저 샛별 어디가 야만적이지 * Andre Breton –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발표한 프랑스 정신과의사, 시인, 초현실주의의 태두 시작 노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은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쓰기에 바빠서 '의사짓'을 포기했다. 그 즈음 미국의 소아과의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는 꼬박꼬박 의사짓을 하면서 시시때때 처방전에 시..

2022.11.26

|詩| 바다 밑 거북이

거북이 눈, 내 아버지 눈 *Largo 템포 너울대는 양쪽 팔 유튜브 미역숲 거북이 참 크다 누구나 안다 소스라치는 열대어 새빨간 몸 흰 줄이 죽죽 간 무늬 고개를 돌리면 몸이 따라간다 갑골문자, 내 배딱지에 갑골문자 text 전혀 어렵지 않아요 자맥질 하는 거북이 이때가 때다 다 큰 어른이 양쪽 팔을 벌리고 나비야 나비야 춤을 추니까 하늘, 흐릿한 하늘에 우르르 펼쳐지는 큰 大자라니까 정말 *라르고: (음악용어) 느리고 장중하게 시작 노트: 느리고 반복적인 음악이 흐른다. 유튜브가 바다 밑 풍경으로 나를 진정시킨다. 거북이가 화면전체를 덮는다. 여간하지 않고서는 배딱지를 보여주지 않는 거북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자리를 잘 감추는 저 거북이. © 서 량 2022.11.25

2022.11.25

|詩| 기생잠자리

웃을 때마다 뇌가 울린다 거대한 숲, 비에 젖은 접동새가 귀 기울이는 천둥 벼락, 지난 여름이 기울 때도 그랬다 새끼 손가락 반만 한 妓生잠자리 妓生잠자리 날개를 반짝이며 쏘다니는 원시의 숲에서 당신은 유튜브를 묵묵히 관람한다 공포에 질려서 마구 고함을 치고 싶어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어도 등허리에 여리디 여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신 로마신화를 슬쩍 빠져나와 속세의 숲을 유람하는 바람의 신 神이라는 당신의 아이디, 이름을 발음하기가 한참 어려운 神이 숲을 회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귀신 신, 웃을 때마다 쑥쑥 올라가는 방문통계 등뼈를 전후 좌우로 흔들면서 영영 당신이 전신을 부르르 떨다시피 시작 노트: 브들레르, 케루악, 긴즈버그, 정진규 같은 산문시인들의 고초를 생각한다. 케루악의 "On the ..

2022.11.19

|詩| 가을의 난동

심지어 캄캄한 우주 깨알만한 은하수까지 움켜쥐는 엄청난 기력입니다 떡갈나무들이 허리 굽혀 옷을 벗는다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추억, 추억 전신이 땅거미 저녁 빛, 오렌지색 황혼 빛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몸부림, 몸부림이 목숨을 거는 모습이다 슬픈 기색이 없이 눈물 따위 글썽이지 않으면서 심지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깁니다 시작 노트: 옛날에 써 두었던 시를 혼쭐나게 많이 뜯어고쳤다. 시를 쓰다 보면 그저 만만한 게 계절을 주제로 삼는 짓이다. 특히 봄이나 가을을 우려먹는다. 전에 이라는 시를 쓴적이 있다. 이번에는 이다. 맞다, 맞다. 계절은 내게 반란을 이르키고 난동을 부린다. 그런 어려움을 섭렵하겠다고 덤벼드는 나도 참, 나다. © 서 량 2008.10.14 – 2022.11.17

2022.11.17

|詩| 화려한 가을

바람결 물결치는 호숫가 머리칼 풀어헤친 갈대들이 서걱거린다 샛노란 금발 또는 갈색 머리 내 어릴 적 앞마당 장독대보다 더 높은 음정 하왕십리 지나 행당동 무학여자고등학교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다음 소절을 예고하는 트롬본 주법으로 낮게 터지는 당신의 탄성 지구의 예민한 음감, 바람이 몸을 푼다 천천히 잠시라도 좋아, 잠시라도 좋다며 우주 속 깊이 자리잡은 무한한 가을을 나는 줄기차게 탐미한다 시작 노트: 가을에는 바다를 멀리한다. 갈대밭을 훑어가는 바람. 잔물결 일렁이는 호수. 행당동 변전소 앞을 지나 전차 역으로 가는 행길에서 무학여자고등학교 아이들 떠드는 소리 들린다. 금관 4중주 연주가 그치지 않는다. © 서 량 2022.10.11

2022.10.11

|詩| 따스한 가을

바람 부는 오후에 간들간들 떨어지는 잎새에서 비릿한 향내 피어난다 이거는 중세기 시절 몸집 하나 우람한 흑기사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송충이 속눈썹에 코가 알맞게 큰 귀부인의 아득한 몸 냄새라고 우기면 고만이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거 말고 아무런 딴짓을 못하는 저 갈색 잎새들은 지들 몸에서 무슨 향내가 나건 말건 도무지 알지 못하지 하늘 청명한 시각에 어둠이 한정없이 깔린 땅으로 나 몰라라 하며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지면 고만이다 곧장 © 서 량 2022.10.8 시작 노트: 가을이면 꽃도 꽃이지만 잎새에 눈길이 자주 쏠린다. 가을은 내 청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중세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말이 시각(視覺)으로 돌변한다. 가을이면 몸의 오감(五感)이 달아오를 뿐, 내가 굳이 가을을 탄다는 말은 ..

2022.10.08

|詩| 산개구리

산에 하늘에 산개구리 산다 내 작은창자에 개굴개굴 산개구리 산다 바위틈 별똥별 날름날름 핥아 먹는 산개구리 여드름 하나 없는 간난아기 볼기짝인냥 뱃가죽 살결 야들야들한 산개구리를 보아라 은하수 건너 후다닥 툭툭 점프하는 저 산개구리를 보아라 툭 튀어나온 눈알 속 깊은 곳에서 새벽 이슬 부르르 훌훌 털고 내 뮤즈를 슬쩍슬쩍 부추기는 산개구리, 아까부터 앞뒤 다 제쳐놓고 중뿔나게 울어 대는 개굴개굴 산개구리, 나는 시방 산개구리다 시작 노트: 20년 전에 쓴 시를 한두 군데 뜯어고쳤다. 내용을 바꾸려 해도 바꾸지 못하겠다. 나는 변한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심하면서도 또 한편 재미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말투가 직설적이 됐다는 점. 그래서 좀 걱정이지. 가을이면 가을마다 개굴개굴 울어대는 산개구리를..

2022.09.29

|詩| 꿈꾸는 의자

균형, 순수와 평온으로 이루어지고, 육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 좋은 의자처럼, 마음을 달래고 진정시키는 그런 예술을 나는 꿈꾼다. --- 앙리 마티스(1869~1954) 등뼈가 앞으로 구부러진 자세 손바닥을 감싸는 옅은 바람 당신의 꿈은 꿈틀대는 애니메이션 크레파스 크레용의 부드러움 보름달 반쯤 가려진 한밤 짙푸른 넓은 잎사귀 숨소리 고요한 숲이다 앉은 자세로 자고 있어요 팔꿈치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당신의 균형이 망가진다 *이무깃돌 입안에서 잠자는 미녀와의 대화가 빗물로 흘러내리는 *성문의 난간에 끼워서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용이나 이무기 머리 모양의 돌로 된 홈 © 서 량 2022.08.28

2022.08.29

|詩| *호랑이를 꿈꾸며

연꽃 열 손가락 선명한 낮달 모습 채광 좋은 숲을 활보하는 나는 호랑이, 굵은 장대비 문양이다 당신이 지켜보는 한여름 밤이 아작아작 씹어 먹는 열매 ukulele 소리 우쿨렐레 우쿨, 렐레, 렐레 ♫~ acacia 꽃을 먹는다 희디흰 아카시아꽃 아카, 아카♪~ 사뿐사뿐 발걸음 가벼운 호랑이 연꽃 뒤 밀림 속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사자, 발바닥 밑바닥에 흙이라고는 없다 전혀 없어 *Dreaming of Tigers: 프랑스 후기 인상파 앙리 루소(1844~1910)의 그림 제목 시작 노트: 그림에 리듬감각이 묻어있다니. 앙리 루소는 꿈 속에서 커다란 호랑이를 올라타고 우클렐레를 친다. 흥겨운 리듬! 갑자기 사과라도 먹고 싶다. 호랑이와 사자가 보는 앞에서. © 서 량 20220812

202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