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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겨울, 무대에 서다

겨울, 무대에 서다 세상과 대적하는 큰 역할이라네 새까만 물개 살갗 턱시도를 입고서 뺨 시린 복숭아색 욕망을 꽁꽁 감추는 완전 무대 체질이었어요 당신이 새빨간 커튼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베이지색 북극 곰 걸음걸이 詩作 노트: 14년 전에 스무 줄이었던 구질구질한 詩를 여섯 줄로 확 줄였더니 속이 엄청 시원하다 © 서 량 2010.01.07 - 2024.01.28

2024.01.30

|詩| 한글과 알파벳

한글과 알파벳 生時, 生時스러운 꿈, 미국여자가 말한다. 세종대왕이 쌍비읍과 쌍지읒의 합성어를 제작했다는 거. 요새 한국인들이 그 텍스트를 싹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 창밖 주홍색 구름이 그거 매우매우 맞는 말이라 소리치네. 우렁차게. 젊으신 어머니,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시네. 내가 미국여자에게 말한다. “영어도 사라지고 있어. 알파벳이 뭉글뭉글 없어지고 있어.” 夢! 夢! 夢! 배경음악이 울린다. 혼성사중창.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뭉그러지네. 조용하게. 詩作 노트: 영어와 한국어를 되도록 섞어서 말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중언어를 둘 다 잘 못한다. 영어가 더 편하다. 미안하다. © 서 량 2024.01.26

2024.01.28

|詩| 산뜻한 절망

산뜻한 절망 아찔한 색채감으로 말하고 싶었다 낙엽이 땅에게 덤벼드는 모습을 희희낙락 보여주고 싶었지 소멸은 광활한 기쁨 물안개 피어나는 몸부림 오른쪽 발을 철썩 내딛는 희열 흩어지는 물방울 모습 잎새의 슬로우 모션 자포자기는 참으로 화사한 색채감이에요 詩作 노트: 14년 전 말투를 뜯어고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겉모양을 바꿨더니 속 내용도 달라진 느낌인데. 글쎄다. © 서 량 2009.04.07 – 2023.11.24

2023.11.24

|詩| 가을 냄새

가을은 갓 끓인 누룽지, 널브러진 이부자리, 가을은 비 내리는 한밤중 당신 심층심리다. 속 깊은 바닷물결에 전후좌우로 몸을 흔드는 미역줄기, 주홍색 햇살 넘실대는 하왕십리 행당동 지나 뚝섬 길섶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도마뱀의 신중한 동작, 가을은 내 몸 냄새다. 씹지 않아도 저절로 씹어지는 군용건빵의 텁텁함, 새벽 4시에 창문을 열면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왕창 쏟아지는 분홍색 초록색, 가을은 빛살 가득한 당신이 얼마 후 부드러워지는 기운이다. © 서 량 2022.09.05 - 2023.11.21 詩作 노트: 고전적 취향에 젖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을은 언어습관에 지나지 않을 뿐. 향기라는 단어선택이 잘 맞지 않는 가을이 나를 지나친다.

2023.11.21

|詩| 벌레잡이제비꽃

벌레잡이제비꽃 인터넷 속 거무튀튀한 돌 틈에 뿌리를 박고 우두커니 서 있는 벌레잡이제비꽃 바람이 구름의 품을 파고든다 활짝 펼쳐지는 핑크 빛 요술 일렁이는 전자파장 벌레잡이제비꽃이 눈물을 흘린다 초록 바람 전자파장 속에 찌르르 감전되는 나 詩作 노트: 24년 전 詩, ‘인터넷에 잡힌 꽃’을 많이 고친다. 24년 동안 나는 좀 달라졌고 語法도 달라졌다. © 서 량 2009.04.14, 2023.10.23 수정

2023.10.23

|詩| 4월과 5월 사이

이제야 쉽게 말하는 법을 배운다. 어느 4월 새벽에 코를 골며 자다가 쇠잔하는 꽃잎처럼 잠꼬대가 툭, 떨어질 때 맹탕 터지는 언어의 희롱이 신기하기도 해라. 4월은 나긋나긋하다. 모처럼 상냥한 낯빛으로 고개를 쳐드는 저 무모한 신록의 저력을 견디지 못해, 나 지금. 저의 불온한 대뇌 안쪽에 숨어있는 신경조직이 지직! 지지직! 전자파동을 일으키는 내내 몇 번이나 혼절을 했는지요. 우리의 순결한 몸 장난은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어. 당신이 철없이 그리운 동안 먹구름 뒤쪽에서 확, 밝았다가 내가 모르는 이유로 스르르 사라지는 빛의 춤사위를 턱없이 보았거든. 상서로운 낌새라 말하고 싶겠지. 눈부셔라. 나 지금 눈까풀을 일부러 밑으로 내리고 있다. 시작 노트: 쉬운 말과 어려운 말은 순전히 주관적인 해석에 지나지 ..

2023.04.28

|詩| 벌레

벌레 비바람 그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네 비바람 소리 꿈결보다 더 크게 들리고 빗속 벌레 소리 요란하네 비에 젖어 노래하는 벌레 비와 몸을 섞는 소리 가까이서 들리네 비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나를 올라 타는 벌레 참숯불로 타다가 아침이면 폭삭 사그라질 벌레 한 마리로 나는 점점 숨이 막히네 시작 노트: 비바람 소리에 섞여 들리던 창밖에서 들리던 소리는 개구리 소리, 귀뚜라미 소리처럼 들렸다. 무슨 합창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순간 얼토당토않게 무당벌레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무당벌레라는 말은 시에 일부러 집어넣지 않았다. - 2023.03.11 © 서 량 2005.10.08

2023.03.10

|詩| 숯검정 강아지

갈색 머리칼이 쑥쑥 보랏빛 하늘로 뻗치는 여인아 콧등에 손가락을 슬쩍 대는 순간 아버지 본적지 초가집 마당 노적가리 밑 코끝 뭉툭하고 뱃살 폭신폭신한 그 옛날 숯검정 강아지만큼 갈색 체감온도가 쑥쑥 보랏빛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여인아 날개 접은 나비처럼 적막한 귀밑머리 아래로 땀을 뻘뻘 흘리는 내 여인아 시작 노트: 프랑스 화가 모네는 1890년과 이듬해 1년 사이에 노적가리 그림을 서른 몇개를 그렸다 한다. 내 나이 열 살 때 할머니가 홀로 사시던 경기도 농촌 초가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거기에 숯검정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름이 워리였다. 매미 소리 요란한 집 마당 노적가리 밑에서 워리와 놀았는데 참 즐거웠다. 모네 그림에 나오는 노적가리와 비슷해 보이던 삼각형 모양의 짚풀더미였다. © 서 량 2005..

2023.03.01

|詩| 여기 있기가 고단해

여기 있기가 고단해 태아처럼 꼬부린 자세로 아늑한 정신병원 벽에 둘러싸인 채 아담의 영혼이 단단히 묶여 있다네 시간은 볼거리도 없이 천천히 기어가는데 그가 깨달은 모든 것은 미래의 기억 뿐 아담은 햇살 바른 푸른 풀밭을 그리워하네 꿈꾸는 사람 없이 올 시즌으로 꾸는 꿈 생각하는 사람 없이 올 인으로 하는 생각 도망치거나 미소 지을 의지조차 없이 죽음처럼 고요한 그룹 테러피를 받는 동안 아담은 고뇌에 찬 미래에서 풀려난다네 시작 노트: 이 시는 인공지능, 'AI'가 공헌한 부분이 20% 정도 된다. ‘아담’이라는 주인공 이름에 정신병원을 주제로 해서 시를 한편 써보라 했지. 2,3초 만에 'Hallmark Cards’에 나올 것 같은 문장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AI'는 말이 많다. 길이를 30%로 콱..

202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