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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가려운 양파

*가려운 양파 -- 넷플릭스 드라마 ‘Warrior (2023)’를 보고 나서 천정이 높은 실내 낡은 피아노 소리가 술잔에 부딪친다 갈매기 날갯짓으로 붕 뜨는 에너지 세포분열이 터진다 경건한 분열 몸놀림 상처 trauma 화면을 적시는 빗물 어깨 뒤태가 두툼한 남자가 오리걸음으로 걸어간다 코를 찌르는 양파 냄새 남자가 속삭인다 The reason I came to America was… 나는 왜 미국에 왔나 주먹질 총질 칼부림 가려운 가슴 위에 얹히는 얼음주머니 여자는 내 고등학교 동창생을 꼭 닮은 주인공 손을 잡는다 詩作 노트: 19세기 말. 샌프란시스코에 철도공사를 위하여 이민 온 중국인들을 백인들이 ‘itchy onions, *가려운 양파’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백인들을 ‘duck, 오리’라 불렀다...

2024.02.22

|詩| 춤추는 봄

춤추는 봄 떡갈나무가 뿌리를 치켜들고 물구나무서기를 했거든요 몸매 날렵한 종달새 한 마리 구름 너머로 날아갔거든요 바람 찬 해변 반짝이는 조약돌이 지난 가을 뒷마당에 매장된 낙엽이 후끈 달아올랐대 아이, 싫어, 싫어! 볼썽사납게 당신이 추는 개다리춤 詩作 노트: 개다리춤: 양다리를 마름모로 벌렸다가 오므리는 행동을 빠르게 반복 하면서 추는 춤 - 뜻이 궁금해서 굳이 사전에서 찾아 봤지. 기하학적인 설명이네. 눈에 선해. 봄춤은 알레그로 템포. 봄이 재빠르게 움직인다. © 서 량 2008.04.18 – 2024.02.08

2024.02.08

|詩| 빨리 뛰기 2

빨리 뛰기 2 네발동물의 두 앞발은 날개다 구름 없는 창공을 나르는 검정색 새 한 마리 잠자리 잠자리들 네 발이 다 무지개 빛 날개로 변한다 양지 바른 앞마당 강아지 강아지들이 엄마를 향해 달리네 달려라 달려 다부지게 다부지게 밤이면 밤마다 새삼스레 걸음마를 배우며 헐거운 이불로 어깨를 덮은 채 끙 옆으로 돌아눕는 검정색 새 한 마리 날아라 날아 암팡지게 암팡지게 으으응 응응 응 詩作 노트: 꿈결인지 생시인지 하늘을 나르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먼 거리라서 몸이 검정 강아지색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 © 서 량 2012.07.03 – 2024.02.02

2024.02.02

|詩| 빛이 없는 자리 2

빛이 없는 자리 2 빛이 함몰한 곳에 가보았다 세차게 끓어오르는 magnetic force 네 귀가 번쩍 들려 거무죽죽한 기와지붕 세찬 바람이 날개뼈를 흔드네 당신의 푹 꺼진 눈등 반듯한 이마 memory 빛이 내뿜는 nostalgia 등등 스며드는 적요가 좋았다 詩作 노트: 詩를 쓰다 말고 별안간 방의 불을 확 끈다 창밖 하늘 빛이 거무튀튀한 기와지붕이네 © 서 량 2011.08.31 – 2024.02.01

2024.02.01

|詩| 사소한 예감 2

사소한 예감 2 탐조등이 암흑을 절단한다 당신이 예각으로 쪼개지고 있어 눈에서 주홍색 전파를 지지직 내뿜는 도깨비를 보았지 도깨비를 방에서 쫓아내세요 흠씬 두들겨 팬 후에 속이 찔끔해지는 말을 해주시고요 부피감 없는 말을 부엌칼로 찔러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귀띔이 있었다 당신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귀신으로 변한 거래 뜨거운 전류가 허파를 관통하네 갈라지는 내 가슴 詩作 노트: 예나 지금이나 내 몸 주변에 전류가 흐르고 있다 특히나 자고 있을 때 같은 때는 더 심하게 흐른다 © 서 량 2011.02.17 – 2024.01.30

2024.01.30

|詩| 겨울, 무대에 서다

겨울, 무대에 서다 세상과 대적하는 큰 역할이라네 새까만 물개 살갗 턱시도를 입고서 뺨 시린 복숭아색 욕망을 꽁꽁 감추는 완전 무대 체질이었어요 당신이 새빨간 커튼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베이지색 북극 곰 걸음걸이 詩作 노트: 14년 전에 스무 줄이었던 구질구질한 詩를 여섯 줄로 확 줄였더니 속이 엄청 시원하다 © 서 량 2010.01.07 - 2024.01.28

2024.01.30

|詩| 한글과 알파벳

한글과 알파벳 生時, 生時스러운 꿈, 미국여자가 말한다. 세종대왕이 쌍비읍과 쌍지읒의 합성어를 제작했다는 거. 요새 한국인들이 그 텍스트를 싹 무시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 창밖 주홍색 구름이 그거 매우매우 맞는 말이라 소리치네. 우렁차게. 젊으신 어머니, 좀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시네. 내가 미국여자에게 말한다. “영어도 사라지고 있어. 알파벳이 뭉글뭉글 없어지고 있어.” 夢! 夢! 夢! 배경음악이 울린다. 혼성사중창.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뭉그러지네. 조용하게. 詩作 노트: 영어와 한국어를 되도록 섞어서 말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중언어를 둘 다 잘 못한다. 영어가 더 편하다. 미안하다. © 서 량 2024.01.26

2024.01.28

|詩| 산뜻한 절망

산뜻한 절망 아찔한 색채감으로 말하고 싶었다 낙엽이 땅에게 덤벼드는 모습을 희희낙락 보여주고 싶었지 소멸은 광활한 기쁨 물안개 피어나는 몸부림 오른쪽 발을 철썩 내딛는 희열 흩어지는 물방울 모습 잎새의 슬로우 모션 자포자기는 참으로 화사한 색채감이에요 詩作 노트: 14년 전 말투를 뜯어고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겉모양을 바꿨더니 속 내용도 달라진 느낌인데. 글쎄다. © 서 량 2009.04.07 – 2023.11.24

2023.11.24

|詩| 가을 냄새

가을은 갓 끓인 누룽지, 널브러진 이부자리, 가을은 비 내리는 한밤중 당신 심층심리다. 속 깊은 바닷물결에 전후좌우로 몸을 흔드는 미역줄기, 주홍색 햇살 넘실대는 하왕십리 행당동 지나 뚝섬 길섶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도마뱀의 신중한 동작, 가을은 내 몸 냄새다. 씹지 않아도 저절로 씹어지는 군용건빵의 텁텁함, 새벽 4시에 창문을 열면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왕창 쏟아지는 분홍색 초록색, 가을은 빛살 가득한 당신이 얼마 후 부드러워지는 기운이다. © 서 량 2022.09.05 - 2023.11.21 詩作 노트: 고전적 취향에 젖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을은 언어습관에 지나지 않을 뿐. 향기라는 단어선택이 잘 맞지 않는 가을이 나를 지나친다.

202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