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수국을 위한 짧은 명상 수국이 전혀 섹시한 모습이 아니라는 변덕스러운 생각이 아까 아침에 잠깐 들었다 수국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장미처럼 보는 이의 혼을 앗아갈 만큼 강렬하지 않기 때문인지 살결이 젖빛으로 뽀얀 사촌동생처럼 호감이 가기는 하지만 내가 밤낮으로 간절히 원하는 찌릿찌릿한 전율 따위는 여간 하지 .. 詩 2010.06.15
|詩| 샐러드 샐러드는 일회용 축복이에요 샐러드는 아무런 드레싱 없이 먹어야 저 애절한, 그러나 싱그럽기 짝이 없는 음식의 참 맛을, 위대한 예수의 살과 피 맛을 알게 된대요 샐러드에도 중독현상이 있대요 당신이 잠결에 입맛을 쩝쩝 다시는 쌉쌀한 샐러드 맛에 나 또한 취해서, 흠뻑 취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 詩 2010.06.11
|詩| 실국수 국수가 글쎄, 백발이 성성한 요술쟁이 노인네, 구름을 훌렁 올라타고 질주하는 눈썹 무성한 신선의 옥양목 옷섶보다 더 씽씽하게 글쎄, 치렁치렁한 내 꿈결 길섶을 훑다시피 후루룩 들입다 날아가는 거에요 국수가 처음 입안에 들어올 때 소스라치게 차갑습니다 좋기만 해요 전신이 간질간질해지는 .. 詩 2010.06.03
|詩| 은수저 은수저는 불량해 산소의 침투로 쉽사리 변색되는 은수저는 은 숟갈과 은 젓가락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뜻이 서로 달라 예배 끝난 교회의 적막 속에서 혹은 강남 역 지하철 7번 출구 앞에서 의견을 달리하고 있어 부산스럽게 생각들이 몸체 미끈한 바다생선처럼 펄펄 뛰며 살아 있다는 게 문제라면 .. 詩 2010.06.03
|詩| 이상한 스페이스 그렇게 잠을 못 이룰 바에야 무지한 몸을 자꾸 뒤척일 것 없이 형광등 창백한 서재 벽 책장 뒤쪽 비밀 문을 스르르 열고 사이버 스페이스에 한 번 들어가 봐. 아라비안 나이트를 훨훨 날아다니는 카펫보다 등뼈 꾸부러진 신선들이 씽씽 타고 다니는 구름보다 몇만 배 더 빠른 속도로 푸르디 푸른 전자.. 詩 2010.05.17
|詩| 민들레 먹기 몇 살 때였는지 남들 따라 진달래를 먹은 적이 있답니다 맛이 좀 쌉쌀했습니다 순수했지요 참기름 양념도 이태리언 드레싱도 간장도 없이 밥 없이 겉절이 김치 맛보듯이 입안에 침이 흥건하게 배 부르게 먹었습니다 소나 사슴이 바람 부는 들판에서 풀이며 꽃을 뜯어먹을 때도 기분이 이렇겠지, 싶었.. 詩 2010.05.06
|詩| 겨울이여 안녕 겨울은 당신의 힘겨운 사랑만큼이나 떠날 때가 돼서야 끈적한 웃음을 흘렸다 겨울 동안 행복했다는 말은 거짓이었어요 추위에 약한 영혼끼리 똘똘 뭉쳐 차가운 상체를 부둥켜안고 회전목마처럼 어지럽게, 어지럽게 돌아가는 동안, 당신 사랑의 혈중농도가 위험수치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연이겠지 희.. 詩 2010.04.06
|詩| 꽃놀이 물놀이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흐느적거리고 비는 쏟아지고, 캄캄한 한밤중에 주절주절 쏟아지고 내가 당신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봄이면 꽃놀이 가을이면 물놀이 배 고프면 비단실같이 가느다란 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곱게곱게 그렇게 누에처럼 사위어가면 어떨까 운.. 詩 2010.03.27
|詩| 새빨간 거짓말 김형, 어느새 우리는 시를 쓴답시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기교를 익혔습니다. 바람에 내장된 불순물이며 간이역에 멈춰선 기차가 한숨 쉬듯 뿜어내는 일산화탄소, 먼 들녘 헐벗은 나무들이 몰래 뱉는 가래침 따위가 눈 위에 뿌려지면 우리 어릴 적 꿈결같은 백설공주의 순결이 한참 .. 詩 2010.03.22
|詩| 가보지 않은 곳의 추억 사람 없음의 괴괴함이 구름까지 치솟는 중세기 성벽의 견고함이 애꾸눈으로 한쪽 다리 목발로 보물섬을 찾아 헤매는 해적 우락부락한 해적들이랑, 글쎄 거칠은 해풍이 몇 백 년을 뛰어다닌 모래 위 발자국들 환히 눈에 괴는 늦겨울 을씨년스러움마저 이리도 깔끔한 추억이 될 줄이야 © 서 량 2010.03.08.. 詩 201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