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바이 어포인트먼트 온리 세종문화원 건너편 미대사관 건물에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밤늦게 알았다. 졸지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상속 관련 문제로 분당 서현동 효자촌 법무사무실에서 시키는 대로 소정양식의 빈칸들을 일일이 채운 후 검색한 미대사관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포인트먼트 없이는 오지 .. 詩 2012.09.20
|詩| 여권만기일 살 떨리는 각성이었다 한여름 케네디 공항에서 자정쯤 내 여행의 자유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료됐다는 소식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때 불면의 밤을 절단하는 탐조등뿐만 아니라 허기진 밤참이 누워있는 식탁에서 생선구이 같은 고소한 비린내가 뭉실뭉실 났습니다 같은 시각에 짙은 안개가 서재 밖 키 큰 나무들 옆을 서성이고 있었지요 칙칙한 지느러미를 휘적거리며 그들이 떼를 지어 내 허랑한 상상력의 변두리를 슬금슬금 헤엄치는 밤이었습니다 이틀쯤 지난 대낮 태평양 뜨거운 하늘에서 발 밑으로 둥둥 떠도는 수제비 구름 덩어리들을 젖은 눈길로 검색했다 그러는 나를 누군가 비정하게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 서 량 2012.09.14 詩 2012.09.14
|詩| 런던 올림픽 여름이 하늘을 가린다 여름 변두리에서 개구리 소리 들린다 드높은 테너 음역을 넘나드는 남성합창 런던에 젊디 젊은 남녀들이 모여든다. 뭉게구름이 히말라야 정상을 감싼다. 정녕 생명체들은 저리도 사납게 얽혀야만 하느냐. 보는 앞에서 육체가 쇠잔해 가는 수영 선수들이 400미터 자.. 詩 2012.07.31
|詩| 빨리 뛰기 네 발 동물이나 다름 없어 앞발 두 개가 슬그머니 날개로 바뀐 저 창공을 나르는 새, 검은 새들을 봐봐 잠자리는 네 발이 양 옆으로 무지개 빛 날개로 변했다네 양지 바른 앞마당에서 우르르 엄마를 향해 달려가던 새끼 강아지들, 발 빨리, 빨리 뛰어야 해. 미끄럼틀에서 쾌속으로 중력의 .. 詩 2012.07.03
|詩| 소리 소문 없이 어디에선가 수상한 소리 들린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인연의 옷깃 스치는 소리 딴 나라 사람 같기도 당신이 고단할 때 내는 목쉰 소리 같기도 왠지 푹 갈아 앉는 기분이에요 여봐라, 거 누구 없느냐 하는 찌렁찌렁한 권위도 없이 슬며시 들려오는 소리에요 말.. 詩 2012.05.28
|詩| 대화 꽃은 깊은 밤에보다 아침에 감성이 풍부합니다 멋 적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는 그런 시간에요 꽃의 소임은 날 유혹하려는 마음을 잘 감추는 일일 걸 꽃은 당신이 바짝 다가와도 꼼짝달싹하지 않는 화사한 아침 이슬 빛, 한참을 내버려두어도 고스란히 남아도는 그렇게 진한 감각이랍니다 © 서 량 2012.05.18 詩 2012.05.18
|詩| 5월 태양이 내 정수리에서 비지땀을 뻘뻘 흘릴 때 몸이 느슨해진다 커다란 수박처럼 쩍 갈라지는 마음입니다 이마가 간지러워요 산들바람 때문에 산들바람 때문에 당신이 양 뺨도 팽팽하게 깊은 혼 앞섶을 풀어 천천히 흡입하는 딸기 맛 산소 산소 산소 © 서 량 2012.05.08 詩 2012.05.08
|詩| 안달 밤 사이에 후덥지근한 봄밤에 땅에서 시루떡 같은 기운이 모락모락 솟아났습니다 봄은 멀쩡한 당신을 물 속에 쑥 집어넣었다가 얼른 꺼낸 다음에 경건한 의식을 거행했다 합니다 이것은 즉 봄비가 수다스럽게 쏟아지는 날 멋진 이태리제 안경을 쓴 채 우산도 없는 당신이 멋도 모르는 사.. 詩 2012.05.06
|詩| 조용한 봄비*** 눈부셔라 이다지 환할 줄 몰랐지 머리가 좀 젖었지만 빛이 섬뜩 흔들려요 손바닥에 촘촘한 실핏줄이 자지러져요 내 칙칙한 그림자여 알록달록한 빗금무늬 빗속으로 납신납신 멀어지는 당신을 본다 © 서 량 2012.04.27 詩 2012.04.27
|詩| 요란한 봄비*** 어느 날 아침, 당신이 연거푸 재채기를 한다면 그건 이미 여리디 여린 신록이 당신을 깊숙이 침공했다는 증거야 내가 늘 당신만을 생각하며 산다고 말한다면 그건 순수한 거짓말이다 스마트 폰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 선명히 들리네 길고 지루한 병동 복도를 걷는 중이야 누구나 열쇠 .. 詩 2012.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