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3월의 변명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린 상수리 나무를 아래위로 훑어봤더니 푸릇푸릇한 바람의 갈기 사이로 나무줄기들의 변덕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들었지. 당신이 내 기분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이해해야 된다는 법은 세상에 없어요. 관절 응어리 마디마다 솜사탕처럼 포근한 기운이 돌.. 詩 2013.03.05
|詩| 2월의 미련 거기에 새까만 머리칼 한 움큼이 떨어져 진득이 엉켜 있었는데 터무니 없는 이유로 오래 된 집념 같은 것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새빨간 꽃 몇 송이가 잔잔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숨 죽이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바람결 추억들이 뚜렷이 솟아난다 지금이나 크게 다름없던 늦겨울 당신의 .. 詩 2013.02.19
|詩| 1월의 폭설 아름다움은 늘 불안한 마음을 유혹하니까 한층 더 아름다워라 저 바람에 흩날리는 캄캄한 밤하늘 눈송이들이 특히 그렇다 내일 아침 교통이 완전 마비되고 중요한 어포인트먼트가 아깝게 취소돼도 괜찮아 밤에 내리는 눈을 내가 크게 좋아한다 해서 당신마저 덩달아 좋아하라는 법은 없.. 詩 2013.02.10
|詩| 겨울에 부는 바람** 머플러가 흔들리며 바람의 흉터를 파고든다 뜨거운 깃발로 펄럭이는 한겨울 한사코 서로 매달리는 벌판 복판에서 폭설에 대해서 알고 싶었어요 폭설이 내 몸을 덮고 있잖아요 폭설의 심성이 거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신(神)이나 폭설이 한동안 다정하다가 한 순간 등을 돌리는 .. 詩 2013.02.05
|詩| 색소폰의 자유* 색소폰은 황금빛 금속의 감옥에 덜커덕 갇힌다 색소폰은 진작부터 노예선 등허리 채찍 자국 난삽한 파도소리에 깊숙이 박혀 철석거리는 바다의 자유를 갈망했던 거야 블루스 스케일을 연습한다 기본음에서 장3도까지 훌쩍 올렸다가 다시 능청스레 반음을 내린 음정을 아랫배에 힘을 주.. 詩 2013.01.15
|詩| 가벼운 힐책 엄청난 속도로 궁창을 질주하는 뭇별들이 마냥 가볍기만 해 해와 달만해도 그렇다 들뜬 풍선처럼 둥둥 떠 날아갈 것 같아 금방 가다가다 날 괴롭히는 저 몹쓸 꽃가루도 가뿐하기만 합니다 꽃가루들이 내 기관지를 욜랑욜랑 파고들어 점막을 쑤시며 콕콕 갉아 먹어요 얼마 전부터 이것저.. 詩 2013.01.05
|詩| 뉴욕 마음 상태 인간이 도시를 앞장서지 못한다 젊은 놈이 웃으며 이리 오시죠! 하는 제스처를 쓰는 미드 맨해튼 레스토랑 앞 길바닥에 언뜻 쥐색인가 싶었더니 푸른 빛이 감도는 비둘기 서너 마리가 나란히들 걸어간다 나는 도시가 빠르게 쇠락하는 겨울이며 급할 때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당신에게 마.. 詩 2013.01.01
|詩| 무작정 내리는 눈 내 몸 피부세포가 툭툭 떨어지듯 눈발이 무작위로 흩날리는 정경을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검토한다 눈 나부랭이들은 짙은 회색 창공에서 서로 좌충우돌하는 법이 전혀 없다 경솔하고 무의미한 몸들끼리 부딪히거나 말거나 뭐가 그리 대수롭겠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윈드쉴드에서.. 詩 2012.12.30
|詩| 개꿈 금방 꾼 꿈 얘기 좀 들어 봐. 위장내과를 하는 나하고 친한 의사 집에서 무슨 파티가 있다 해서 갔는데 파티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내 구두가 없지 뭐야.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고 그 친구도 없어지고 해서 할 수 없이 현관에 놓여있는 짚신 한 짝과 슬리퍼 한 짝을 짝짝이로 신고 집 밖으로.. 詩 2012.10.05
|詩| 달 잡기* 달은 도무지 끝이 없는 추억의 늪에서 해상도도 촘촘한 컴퓨터 메모리로 내가 생각이 없을 때만 골라서 나를 찾아왔다 그건 그야말로 급습이었어 오해하지 말아라 내가 슬펐다는 게 아니라는 걸 달을 뜯어본다는 건 참 쑥스럽고 이상해 눈만 감으면 고만인 걸 달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양 손으로 꽉 붙잡았다 달은 아무 저항 없이 몸부림도 치지 않았다 달과 나 사이에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 오해하지 말아라 비속에서 누군가가 좀 심하게 울었다는 걸 © 서 량 2012.10.03 詩 2012.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