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원 건너편 미대사관 건물에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밤늦게 알았다. 졸지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상속 관련 문제로 분당 서현동 효자촌 법무사무실에서 시키는 대로 소정양식의 빈칸들을 일일이 채운 후 검색한 미대사관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포인트먼트 없이는 오지 말라 하더라. 여름 비 주룩주룩 내리는 다음날 아침 여드름 왕성한 사내애들이 형광 빛 초록 윗도리를 걸치고 미국을 미워하는 테러리스트들을 기어이 잡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미대사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진작 약속을 할걸 그랬나 봐. 당신 스케줄을 재삼재사 확인한 다음 내 구질구질한 전생을 홀랑 팽개치고 이 뜨거운 현생으로 뛰어들걸 그랬나 봐. 빗방울이 하염없이 부딪쳐 흩어지는 검정 우산을 쓰고. 내 전신을 포근히 감싸주는 새까만 우산을 쓰고.
© 서 량 201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