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시론토론 --문정희에게

서 량 2021. 9. 14. 19:35

 

 

일년 좀 넘어서 뉴욕 북쪽으로 차를 몰면서 옆 자리에 앉은 정희에게 나는 내 시만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남의 시는 마음에 차지 않으니 어쩌면 좋지? 하며 말했다가 얼른 후회한다. 빨강 노랑 나뭇잎들이 차창에 마구 달려드는 가을 하늘 곁으로 정희가 깜짝 놀라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노려본다. 위험천만한 발상! 이 사람아, 설사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해도 그렇게 함부로 발설하는 게 아니지.

 

일년 좀 넘는 동안을 한 달에도 몇 번씩 낯을 붉히면서 왜 내가 그런 교만한 말을 했나 하며 고민한다. 하다못해 저 무시무시한 무의식에 도사린 어떤 무슨 뾰족한 이유라도 있겠지. 엄청난 발언 뒤에는 늘 구질구질한 이유가 있으니까.

 

오늘은 내 서재 창 밖 나뭇잎들이 한 70 내지 80프로가 다 떨어지고 거의 앙상한 뼈만 남은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문득 그때 내가 한 그 말을 얼굴을 찡그리며 차분한 말투로 한 번 더 한 다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견디지를 못하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싶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부모 형제 처자식 친구들에게도 솔직히 말해야겠다. 나는 혼자 생각만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남의 생각은 내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한참 사실이라고. 그리고 내친김에 한마디만 더 하련다. 무지기 터놓고 말해서, 내 자신의 생각들도 내 머리에 다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내 주제, 내  현실이라는 그 으스러지도록 뼈아픈 진실에 대하여.

 

 

© 서 량 200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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