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451. 언어의 희롱

“대체로 언어는 진실을 감추는 도구다.”라는 명언을 남긴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의 유튜브, “On Euphemisms, 완곡한 표현에 대하여”(1990)를 다시 본다. 전쟁 중 병사들이 겪는 신경증상을 1차 세계대전 때 ‘shell shock, 전쟁 신경증’이라 했고, 월남전쟁 후에는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1920년대 초의 ‘신경증’이 반백 년 후 정신병으로 변한 것이다. ‘blind, 장님’을 ‘visually impaired, 시각장애자’로 ‘physically handicapped, 지체부자유자’를 ‘physically challenged, 신체장애인’로 미국..

|컬럼| 450. 여자, 여인, 여성

한 주일 내내 궂었던 날씨를 뒤로하고 며칠을 청명한 하늘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2023년 9월 중순 뉴욕 가을 초입이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어린 시절 동요 가사가 떠오른다.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부분에서 피식 웃는다. 어린 나이에 여자가 치마를 갈아입는 장면을 연상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맞다. 방금 ‘여자’라 했다. 남자의 반대말로 쓰이는 여자. 군대시절에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해변의 여인아~♪” 부분에서는 ‘여인’이라는 말이 아주 쿨하게 느껴졌다. 여인은 여자의 아어(雅語). 우아한 단어다. ‘해변의 여자야’, 하면 기분을 잡쳐버린다. 여자의 반대말은 남자지만, ‘여인’의 반대말로 ‘남인’이라고 하지는 않는 게 이상하다. 조선 시대의 사색당파 중..

|컬럼| 448. 꿈, 詩, 그리고 無意識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에 대하여 생각한다. 꿈을 꾸면서 자신이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두뇌작용이다. 자각몽은 꿈의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한다. 8000년 전 티벳의 요가수행에서 출발한 자각몽. 2000년 전 불교수행의 분파로 다시 성행된 자각몽. 1970년대부터 과학적 연구대상으로 대두된 자각몽. 흉측한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서 아, 지금 내가 꿈을 꾸는 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순간 당신은 혼비백산으로 흩어지는 공포심을 컨트롤하면서 괴물에게 말을 거는 여유가 생긴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보는 대담한 질문에 괴물이 잠시 주춤한다. 괴물의 언어감각은 당신을 따라잡지 못하는 법. 괴물이 위협적인 행동으로 당신을 ..

|컬럼| 447. 반말

한 정치가가 노인네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서 치열한 공방이 일어나고 있는 2023년 8월 한국이다. 폄하! 낮출 貶. 아래 下. ‘가치를 깎아내림’이라 사전은 풀이한다. 듣는 사람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에는 내용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면 형식적인 이유도 있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춘 듯 들리지만 말의 내용이 안하무인일 수 있는 반면에 상대를 무시하는 말투, 이를테면 ‘반말’을 듣는 순간 불쾌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하대(下待)를 받는 경우다. ‘반말 살인’이라는 말로 구글검색을 해 보라. 반말을 했다 해서 살인이 일어난 사례가 당신의 모니터에 우르르 떠오를 것이다. 2019년 8월에 한국을 경악시킨 ‘한강 몸통 시신 살인사건’도 반말에서 시작됐다는 위키백과 보고를 읽는다. ‘半말’은 문자 그대로 반만..

|컬럼| 446. 관계

관계 그룹 사이즈가 12명 이상으로 커지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의 진행이 힘들어진다. ‘대화’는 그룹 멤버들 사이에 오가는 말, 또는 그룹 리더가 그룹에게 하는 말로 이루어진다. 16명이 극장식 좌석배열로 앉아있다. 심도 깊은 대화의 장을 열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몇 적극적인 성격의 환자가 강의를 도와줄 것 같다. 오래전부터 ‘인간관계’라는 제목으로 환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노려왔다. 걸핏하면 주먹다짐을 할 뿐더러 서로 깊게 미워하는 관계에 쉽게 빠지는 불안하고 다정다감한 여러 환자들이 내게 동기의식을 부추긴 점도 있다. ‘관계, relationship’의 예를 들어 봐라. 성미 괄괄한 한 환자가 숨가쁘게 대답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같이 하고 섹스를 하고 결혼해서 행복하..

|컬럼| 445. 인사이드 잡, Inside Job

병동에 환청 증세가 있는 환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체로 환청에 대하여 내게 소상하게 말하지 않는다. 50대 중반의 필립이 다른 병동에서 내 병동으로 꽤 오래 전에 후송돼 온 이유는 그곳 정신과의사에게, “Stay away from me! 가까이 오지 마!” 하며 복도에서 음산하게 말하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속 마음을 남에게 쉽사리 털어 놓는 성격이 아니다. 내가 얘기를 하자 하면 낮은 목소리로 거부한다. 필립이 외로운 자세로 병동을 걸어간다. 뒷짐을 지는가 하면 양손을 위로 올리며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무슨 시그널을 보내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다른 환자들은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를 회피하려는 눈치다. 그가 내 오피스 앞을 지나가며, “You don’t understand, ..

|컬럼| 444. 출감

병동환자들이 퇴원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감옥에서 죄수들이 출감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다. 자유민주주의, 할 때의 바로 그 자유! 나는 환자들에게 천천히 말한다. “너희들이 퇴원 시켜 달라고 매일매일 떼를 쓴다 해서 오냐오냐 하며 퇴원을 시키는 건 온당치 않다. 너희들을 그냥 길거리에 내던질 수는 없어! ‘community residence, 지역사회 거주지’에서 받아주면 좋겠지만 남들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노생큐’란다.” ‘improve, (증세가) 호전되거나 나아지다’라는 화제가 나온다. 낫는다는 게 뭐냐? 누군가 대답한다. “Feeling better! 기분이 좋아지는 거요!” “오케이,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어떤 건지 말해봐라.” 그들과 나는 더 ..

|컬럼| 443. 큰 목소리로 말하라

찰스의 별명은 ‘loudmouth, 수다쟁이, 떠버리’다. 영어나 우리말이나 이 호칭은 말이 많은 사람을 낮잡아 부를 때 쓰인다. 사사건건 할말이 많을 뿐더러 한번 말을 시작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찰스. 특히 아침 조회시간에 다른 환자들의 빈축을 산다. 말의 앞뒤가 맞건 틀리건 그의 목소리는 일관성 있게 거칠다. 어떤 때는 고함도 지른다. ‘shout’는 ‘소리 지르다, 고함치다’로 번역된다. 큰 반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해도 어딘지 사나운 기세가 깃들여진 말투다. 광화문 같은 데서 수많은 인파가 목청을 돋구어 소리치는 정황에 걸맞는 표현이다. ‘shout’와 ‘shoot, (총 등을) 쏘다’는 같은 말뿌리에 왔다. 축구 경기에서 관중이 환호하는 ‘슛~!’, “회식하러 가자. 오늘은 내가 쏜다..

|컬럼| 442. 낯가리기

에즈라는 기분장애와 성격장애가 심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다가 법적인 문제조차 겹친 결과로 내 병동에 오래 머문다. 그는 증세가 완화되어 퇴원을 바라본다. 뉴욕 북부 소도시의 ‘Community Residence, 지역사회 거주지’에서 받아주겠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기숙사 같은 곳. 그는 그곳의 삶이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는 폐쇄병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에즈라가 마음을 바꾼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퇴원을 하지 않겠다고 우긴다. 병동생활이 너무 힘이 든다며 시시때때 뗑깡을 부리면서 얼마나 자주 직원들을 괴롭혀 왔는데. 직원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앓던 이빨 빠지듯이 일상의 행복지수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다. 퇴원을 거부하는 이유인 즉, 생각..

|컬럼| 441. 미국식 교장 선생

옛날에 육군 군의관으로 임관하기 전 훈련병 시절 스트레스가 심했던 기억이 난다. 병동 입원환자들의 단체생활을 보면서 가끔 일어나는 연상작용이다. 단체의 스케줄에 따르는 삶은 자유행동의 여지가 별로 없다. 기상, 취침, 프로그램 참가, 식사 시간이 늘 일정하다. 아침마다 거행되는 ‘community meeting’도 그렇다. 고리타분한 번역으로 ‘반상회(班常會)’, 또는 그냥 ‘커뮤니티 미팅’이라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을 나는 ‘조회(朝會)’라 부른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던 기억이 새롭다. 며칠 전 조회 시간에 ‘wheeling and dealing’을 화제로 삼았다. 노름꾼 사이에 유행했던 슬랭. 쉽게 말해서 ‘부정거래’라는 뜻. 정치가들 사이에 돈이 오가는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