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4

|컬럼| 471. 지구 들어올리기

“내가 설수 있는 단단한 자리와 지렛대를 주면 나는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Give me a firm place to stand and a lever and I can move the Earth.” 라고 말한 아르키메데스를 생각한다.  ‘내게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주면 나는 성격장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병동직원에게 나는 속삭인다. 건방지거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단,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나의 시간은 둘 다 충분히 길어야 한다는 점이 이슈다. 부모님 3년상이 우리의 오랜 유교식 전통이지만 현대에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을 약정해 놓은 사회적 통념에는 정신과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의 심리적 아픔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그 정도 시간..

|컬럼| 449. 독백

옛날 정신과수련의 때 뉴저지 큰 정신병원에서 주말 문라이팅, ‘알바’를 한적이 있다. 노인병동에서 두 노인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쪽이 자기는 변비가 심하다고 투덜댄다. 다른 쪽은 수십 년 전 취중운전으로 아들이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한다. 둘은 서로 말을 오버랩 하지 않고 상대가 말을 멈추면 자기 말을 한다. 상대의 말에 대한 반응은 없다. 계속해서 웃는 얼굴 표정으로 독백을 이어가는 그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말을 ‘주고 받는’ 행위를 대화(對話)라 하지 않는가. 자기 말만 열심히 할 뿐 상대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들이다. 그룹테러피 중 환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혼잣말을 하는가. ‘멘탈 체크, mental check’를 하기 위해서라고 누가 답한다. 나도 가끔..

|컬럼| 470.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그룹테러피를 시작하면서 투덜대듯 말한다. 내가 시시때때 혼자 궁금해하는 의문점이 하나 있다. 그룹에게 우울증에 관하여 말하면 그룹멤버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분노에 대하여 언급하면 노기를 띄운다. 평화에 대하여 말하면 장내 분위기가 고요하다.  그룹을 시작할 때 내가 내세우는 우울증, 분노, 평화 따위는 하나의 화제(話題, 얘깃거리, 토픽)일 뿐인데 이것은 참 이상하지 않는가. 범죄를 화제로 삼으면 그룹멤버들이 범죄자가 되고 신을 언급하면 멤버들이 모두신이 된다는 말인가. 그룹리더가 최면술사인가. “그룹=그룹 토픽 자체”? 민중의 리더 역할을 하는 정치가는 최면술사인가. 언론을 ‘medium’의 복수, ‘media, 미디어, 매체’라 한다. 옷 안쪽에 찍혀 있는 ‘medium’이라는 표시는 옷의 크기가 중..

|컬럼| 469. 피자와 막대기

병동의 규칙을 언급하면 묵묵무답. 그러나 피자를 화제로 삼으면 모두의 표정이 환해지는 금요일 오후 그룹 세션이다. 우리는 왜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피자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가. 피자 냄새와 맛이 연상되는 순간 후각과 미각이 합쳐져서 감각적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묻는다. 한국인들도 피자를 좋아합니까. 토핑으로 무엇을 얹어 먹습니까. ‘pizza’는 ‘피쩌’라 발음하면 어쩐지 공격적으로 들린다. 경음을 피하고 ‘피자’, ‘자장면’이라 하면 맥없이 부드러운 기분이다. ‘noodle, 국수’, ‘chop suey, 잡채’ 같은 발음도 다분히 여성적이다.  납작한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pita’와 그리스어 ‘petta’는 ‘pizza’와 말뿌리가 같다. ‘피쩌’는 전인도유럽어의 쪼가..

|컬럼| 211. 어미 탓이라고?

1940년대 후반에 어머니가 자식을 잘못 키워서 정신분열증이 생긴다는 학설이 떠돈 적이 있었다. 마치도 한 국가의 모든 잘못된 일이 다 대통령 책임이라는 소견과 비슷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 때문에 심리적 고통을 당했던 그 당시 분열증 환자 어머니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품는다. 당신도 알다시피 정신질환은 유전적인 요인이 가장 큰 이유인 것을. 1950년대에 어떤 가정의 환자가 정신병원에 자주 입원을 하느냐는 연구가 영국에서 활발해졌다. 환자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 부모나 배우자하고 함께 살면 형제자매와 같이 지내거나 공공시설에서 거주하는 경우보다 훨씬 자주 증상이 재발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에서 시작된 연구과제였다. 가족들의 감정표현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환자의 입원빈도가 증가한다는 것이 영..

|컬럼| 468. 네고

네고’는 참 이상한 말이다. ‘negotiation’의 처음 두 음절만 남기고 나머지는 싹 삭제된 콩글리시다. 미국인들이 ‘deal’이라는 일상어를 쓰는데 반하여 우리는 굳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유식한 단어를 쓴다.  ‘니고시에이션’이라 발음하는 이 어려운 말을 사전은 ‘협상, 교섭, 절충, 협의’ 따위의 한자어로 육중하게 풀이한다. 물건 값을 깎으려고 흥정하는 장면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다. 클린네고, 케이블네고, 先네고, 네고王 같은 잡탕 어휘가 언어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한다.   남들과 마음을 절충하는 과정을 그룹테러피의 주제로 삼는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deal’, 딜, 거래(去來)를 해야 된다는 야무진 의견이 나온다. 나는 그 말에 집중한다. 거래는 갈 去,..

|컬럼| 467. 꿈속의 대화

나와 크게 다름없어 보이는 환자 열 대여섯을 앉혀 놓고 담론을 펼친다. 오늘은 ‘agitation, 동요(動搖)’에 대하여 토론할까 하는데, 이 어려운 라틴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느냐. 이태리 태생 젊은이가 자신 있게 말한다. ‘acid indigestion, 위산과다’에서 왔습니다. 1980년대 뉴욕 이태리 이민자들이 ‘agita’라는 슬랭을 쓰기 시작했다. 산(acid)을 뜻하는 이태리어 ‘acido’의 사투리. 1990년 중반쯤 정신적 동요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알아듣는 슬랭이 됐다 한다. 그러나 ‘agita’와 ‘agitation’는 스펠링이며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서 그치고 만다. 라틴어 ‘agitation’는 ‘흔들림’이라는 뜻이었다.  ‘agitation’의 뜻은 현대어에서 크게 셋으로 나뉜..

|컬럼| 466. 환자와 함께 놀기

스무 살 초반, 백인 청년 피터는 완전 트러블 메이커다.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거나 당나귀식 발길질을 해서 큰 구멍을 낸다. 직원을 때리고 손톱으로 팔을 긁어 자해를 하기도 한다.  피터는 공격성이 강하고 충동심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기질을 타고났다. 사회는 성품이 유별난 아이에게 정신과 병명을 부여한다.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非行)을 약으로 고치려 하거나 심리치료사에게 떠맡긴다. 21세기 부모들은 자기네들 할 일이 벅차고 바빠서 자식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뗑깡을 부리면 병동직원들이 쩔쩔매는 상황을 대놓고 즐기는 피터는 솔직히 좀 악질이다. 나는 곧잘 그의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정신과의사는 자신의 개성을 감추지 않으면서 편안한 자세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쩔쩔매..

|컬럼| 465. 레드 헬리콥터의 친절

2024년 4월 9일 이륙한 ‘red helicopter’를 좀 화급하게 읽는다. 저자 한국인 2세 ‘James Rhee’는 수년 전 작고한 내 의대 5년 선배 이유찬 님의 아들이다. 올 52세.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매각 위기에 처한 흑인 여성들을 위한 의류산업체 ‘Ashley Stewart’를 기적적으로 구출하여 2013년부터 2022년에 걸쳐 성공적인 ‘CEO’로 금융계의 신선한 토픽으로 부상한다. 그후 제임스는 자신이 5살 때 친구 아버지에게서 선물 받은 ‘red helicopter’의 기억을 되살려 미국의 자본주의에 ‘combination of kindness and math, 친절과 수학의 콤비네이션’ 철학을 유입하는 무브먼트의 창시자가 된다. 유명 대학과 금융기관..

|칼럼| 464. 왜 너 자신을 빼놓느냐

스티브는 전형적인 정신질환 증상이 전혀 없는 40대 중반의 백인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 변덕이 죽 끓듯 하면서 때로는 고집불통이고 걸핏하면 화를 낸다. 화가 치밀면 고함을 지르고 벽을 주먹으로 쾅쾅 때리는 버릇이 있다. 그는 수년 전에 저처럼 성미가 불 같은 걸프렌드와 한동안 같이 살았다. 그들은 언쟁이 잦았다. 여자가 집을 나가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진다. 이윽고 상실감이 분노로 변하면서 모든 세상 사람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스티브야, 너는 도대체가 왜 자기 자신은 제켜놓고 남들에게만 신경을 쓰면서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사느냐. --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의를 품고 나를 못살게 굴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러는 겁니다. …자신은 남에게 실수로라도 못되게 군적이 없느냐. – 나는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