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252. 눈 속의 무당벌레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뉴욕에 20인치가 넘게 폭설이 내렸다. 뉴욕 시장 빌 드블라지오는 아침 일찍 티브이에 나와 위태로운 도로사정을 예고하면서 절대 집밖에 나가지 말라며 "Stay home!" 하고 힘주어 말했다. 생체가 스트레스에 처했을 때 일으키는 원초적 반응을 생리학에서 "Fight or Flight"라 한다. 위기와 맞붙어 맹렬히 싸우거나, 힘이 딸려 여의치 못하는 경우에 오금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는 원리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 그것은 즉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요지부동으로 있는 제3의 수법. 그날은 폭설과 싸울 수 없었고 열대의 섬으로 피신하고 싶어도 비행장으로 가는 도로가 완전 폐쇄된 날이었다. 미국인들이 개에게 "Stay!" 하고 소리치면 그것은 꼼..

|컬럼| 407. 정상, 비정상, Crazy?

엊그제 병동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미친(crazy) 생각을 할 수 있고, 미친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친 행동은 절대 안 된다. 우리 사회는 미친 ‘행동’을 용허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BC 322~384)가 주창한 웅변술의 3대 요소, Pathos(감성), Logos(논리), ‘Ethos(문화)를 생각한다. 감성은 원시적 본능, 논리는 일상적 자아, 문화는 사회적 윤리를 대변한다. 이 세 기둥이 튼튼하게 잘 어울리면 듣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단다. 정치가들의 발언에도 너끈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허버트는 병동에서 화장실 변기에 비닐봉지, 우유통 쪼가리 따위를 집어 넣어서 변기를 막히게 하는 짓을 한다. 하나의 변기가 막히면 모든 환자들이 다른 병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되는 불편..

|컬럼| 459. 심리치료

…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2001년 본인 詩, 「사고현장」 나는 약물치료에 치중하는 정신과의사를 ‘druggist, 약사’라 부른다. ‘druggist’라는 앵글로색슨어는 ‘pharmacist’라는 라틴어보다 소탈하게 들리지만, 길거리 마약도 ‘drug’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감이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심리치료에 의존하는 정신과의사를 ‘psychotherapist’라 한다. 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인 반면, 심리는 추상적인 컨셉이다. 약을 신봉하는 의사를 ‘유물론자, materialist’, 심리치료를 추구하는 의사를 ‘유심론자, mentalist’라 부르면서 유사시..

|컬럼| 458. 꼰대

초등학교때 ‘김대곤’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별명이 ‘꼰대’였다. 놀리기 좋아하는 또래들이 ‘대곤’을 ‘곤대’라 거꾸로 부르다가 꼰대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꼰대가 어른이나 아버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왜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잘 몰랐다. 마침 또 대곤이는 어딘지 어른스러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같은 나이 친구를 꼰대라 불러대며 아버지를 연상하는 게 재미있었겠지. 네이버 사전은 ‘꼰대’를,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 풀이한다. ‘꼰대스럽다’는 형용사를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해석한다. 꼰대들은 훈장기질이 농후한 노인네들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믿는 사람들. 꼰대는 젊은이를 얕잡아본다. 때때로 깔보는 태도를 취한다. 연장자들이..

|컬럼| 467. 시니어 모멘트

노인네들은 겸손하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은 본능적 몸가짐이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등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이 마치 무슨 용서라도 구하는 태도다. 노인네들은 공손하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고 싶다. 같은 말을 앉은 자리에서 되풀이 하거나 전에 했던 말을 하고 또 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뜸을 들이며 쉼표 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 그, 왜, 저’, 하는 간투사로 언어공간을 메꾸는 사이에 상대방이 몸을 꼰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을 회고하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은 현재보다 과거가 좋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가난과 곤혹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웃기도 하고 ‘개고생’ 하던 군대생활을 떠올리고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그때는 ..

|컬럼| 456. 이상한 시추에이션

골동품상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이혼녀가 말한다. “당신이 하는 어려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나를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잘난 척하는 태도도 기분 나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될까요?” 하니까 이런 응답이 나온다.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거든요. 외출 후 아파트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내게 뛰어옵니다. 이곳에 내가 도착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반겨줬으면 좋겠네요.” 그녀와 내 마음의 결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반가워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애정 있는 분위기를 내가 풍기지 못한 거다. 그런 멘탈 이미지에 그녀는 강한 애착심을 품고 있다. 존 보울비(John Bowlby: 1907~1990)는 ‘애착이론, Attachment Theory’으로 정신상담 발전에 크게 공헌한 영국 정신분석가. 그..

|컬럼| 455. 문 닫고 지내기

문이 있고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잔디밭 돌길.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서재를 지나 반들거리는 복도가 부엌에 이른다. 문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칸막이를 상징한다. 문은 외부자극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피스 문을 닫은 채 직장이나 연구실에서 열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추구하는 작업에 심취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지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남과 소통하고 싶은 기색을 도통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워크가 산더미로 쌓인 병원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중 전화가 온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야,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폐증상, autistic symptom’이 도지는 것 같다, 하며 농담을 내뱉는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

|컬럼| 454. 바람떡

옛날에 정신치료에 심취한 적이 있다. 남들을 대할 때 손에 땀이 나서 악수하기를 꺼리는 핸섬하고 스마트한 40대 중반 독신 로버트의 형은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 놈’이다. 누이 셋은 왕년에 잘 나가던 시스터 보컬 그룹. 주야장천 형제자매 이야기만 하는 로버트. 로버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필, feel’이 잡히지 않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 삶은 끊임없는 ‘가십, gossip’의 연속일 뿐 저 자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로버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주체(主體)의 부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는 주어(主語)의 부재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자아(自我)의 부재현상. 단군의 후손들 핏속에 흐르는 피해의식, 남의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불안감 때문에 문장에 주어가..

|컬럼| 453. 아하와 어허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모음(母音) 탓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다 ‘에미 소리’ 탓이다. “아, 그리운 고향!” 하며 탄식한다. “어, 그리운 고향!”이라 하지 않는다. 나도 너도 ‘아버지, 어머니’ 한다. ‘어버지, 아머니’ 하지 않지. ‘아’는 밝고 남성미 흐르는 적극적 어감이지만 ‘어’는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풍긴다. ‘나’, ‘너’는 ‘아’와 ‘어’ 직전에 콧소리(鼻音) ‘니은’이 들어간 순수 우리말. 나는 당당한 주관이고 너는 약간 어두운 내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너는 날뛰며 나서는 나를 다스리는 고충을 감수하는 내 어머니의 직책을 맡는다. ‘aha!’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강하..

|컬럼| 452. 베이컨을 좋아하세요?

‘배다’를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➀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 냄새가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아 있다. ➁배 속에 아이나 새끼를 가지다, 물고기 따위의 배 속에 알이 들다. ➂물건 사이가 비좁거나 촘촘하다, 생각이나 안목이 매우 좁다. ➃배우다 (비표준어) 한자어로 ➀을 습관 ➁를 임신 ➂을 치밀 ➃를 학습으로 명사화 해서 생각하면 얼른 이해가 간다. ‘배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원학적으로, ‘배우다’가 ‘배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라. 배운다는 것이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인생경험, 철학적 명제의 깊은 이해처럼 시일과 반추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래서 인간은 긴 세월을 학교를 다니고 임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