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4

|컬럼| 214. 사디즘과 나르시시즘

2014년 4월 한국의 한 병장이 일등병을 큰 이유 없이 때려죽였다는 어처구니 없는 뉴스를 읽고 사디즘(sadism, 가학증)에 대하여 생각했다. 프랑스의 미치광이 귀족,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은 '가학성 변태 성욕'을 실천에 옮긴 인류의 원조로 손꼽힌다. 74년 평생에 29년을 감옥에서 그리고 마지막 13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사드'의 이름에서 유래한 사디즘이라는 말은 원래 남에게 성적으로 고통을 주는 쾌감을 뜻했지만 근래에는 남을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병적인 즐거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변했다. 사디즘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정신과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으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매사에 ..

|컬럼| 295. 말없음에 대한 정신분석

의사와 환자의 의사소통에 대하여 생각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 사람과 정신과의사라는 다른 한 사람 사이에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대화를 나눌 때 환자건 의사건 서로 언급을 하는 사항보다 언급을 하지 않는 사항이 더 많다는 사실도 이상하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소통과 불통에 적용된다. 사실 우리는 말하기(有言)보다 말없기(無言) 쪽으로 더 관심을 쏟아야 할 때가 많다.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카테고리로 침묵의 의미를 분류한다. 1. 마음이 편해서 말이 없기흔쾌한 휴식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에너지의 재충전. 음악회 중반부에 삽입된 인터미션의 효능이랄 수도 있겠다. 감칠맛 나는 섹스를 끝낸 원기 왕성한 남녀가 서로에게서 잠시 떨어져 제각각 말없..

|컬럼| 78. 신(神)은 '좋은 것'이다

'good'은 15 세기 이전 고대영어에서 '모이다; 어울리다; 의견을 같이하다' 라는 뜻이었다. 그 말의 잔재가 현대영어의 'gather(모이다; 함께하다)'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사람들이 모이거나 어울리고 공감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렇게 'good'에는 인간이 표범처럼 혼자 다니지 않고 사자들처럼 집단생활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내력이 숨어있다. 인간과 사자의 공통점은 생존의 어려움에서 오는 극심한 외로움에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알다시피 'god'와 'good'은 거의 같은 발음이다. 고대 홀란드 말로 신을 'god'이라 했고 '좋다'는 'goed'라 했다. 독일어로도 신은 'Gott'이고 '좋다'는 'gut'이다. 이렇듯 신은 좋은 것을 대표한다. 미국 돈에 써 있는 '..

|컬럼| 484. 도망자

1960년대 중반경 미국과 한국을 휩쓸었던 미드 를 기억하는가.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제라드 경위에게 쫓겨 다니면서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하여 ‘외팔잡이 사내’를 잡을 때까지 미 전역을 방황하던 소아과의사 리처드 킴블의 어두운 얼굴을. ‘도망자’는 도망할 逃, 망할 亡, 놈 者, 나쁜 뜻이다. 어릴 적에 한자어 ‘亡’자를 무서워한 적이 있다. 사실은 지금도 좀 그렇다. 니은자에 뚜껑을 위태롭게 얹어놓은 것 같기도, 상투가 달린 디귿자처럼 보이는 망할 亡.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과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치매 상태를 뜻하는 망령(妄靈). 기억력이 완전 망가진 망각(忘却), 사방팔방 검푸른 파도만 출렁이는 망망대해(茫茫大海). 망중한(忙中閑). 정치적 이유로 본국을 떠나는 망명(亡命). ‘망’이..

|컬럼| 483.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있다. 젖..

|컬럼| 482. 주삿바늘과 아메리칸 치즈

내가 전병원의 ‘lunch coverage’를 맡는 날, 점심시간 끝 무렵. ‘Code Green’, 위기상황을 알리는 확성기에서 명시하는 장소가 3층 식당이다. 어느 병동 환자가 무슨 일을 터뜨렸을까. 나이가 스물 안짝으로 뵈면서 좀 뚱뚱한 여자환자가 식당 앞 복도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다리를 뻗은 채 ‘L-shaped’, 니은(ㄴ)자로 앉아있다. 병동직원 서넛이 그녀를 둘러싸고 무언지 큰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는 상황. 환자는 눈을 아래로 깐 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기색.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식사를 끝내고 다들 병동으로 돌아갔는데 이 환자 혼자서만 벽에 기대앉아 한 마디 말도 없이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얘는 평소에 남들과 의사소통을 곧잘 하는 편입니까? 암, 그렇고 말고요.  이름이 뭐..

|컬럼| 481.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 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

|컬럼| 480. Hungry, Angry, Lonely, Tired

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 슬로건에 심도 깊은 컨셉이 많이 있다. ‘Forgive and forget, 용서하고 잊어라’, ‘Let go and let God, 놓아버리고 신에게 맡겨라’ 하는 금언들이 그렇다. 슬로건은 운율감으로 호소력을 높인다. 금주(禁酒)가 걱정되는 경고, ‘Hungry, Angry, Lonely, Tired’가 있는데 약자로 ‘H.A.L.T’라 한다. 군대용어로 잘 쓰이는 ‘halt’는 ‘hold’와 같은 말뿌리로 ‘멈추다’라는 뜻.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허기지고, 화가 나고, 외롭고, 고달픈 것은 별로 권장할 만한 정황이 아니다. 허기와 고달픔은 육체적 증상 뿐만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포함한다. 배가 고..

|컬럼| 479. 똥꿈

똥꿈 신라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오줌 꿈’을 꾼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보희가 산 위에서 배설한 오줌이 엄청난 분량으로 서라벌 땅을 적시는 꿈이다.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건네주고 그 길몽(吉夢)을 산다.  문희는 오빠 김유신의 계략으로 선덕여왕 왕실의 고위급 인사 김춘추와 여차여차하여 정을 맺는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그와 혼인하여 7세기 중반에 왕비가 된 문희는 언니의 꿈을 매입하고 팔자를 고친 셈이다. 그룹 세션. 간밤에 똥을 만지는 꿈을 꿨다고 한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은 속뜻과 겉 뜻이 반대일 경우가 많다고 했지. 우리의 무의식은 겉과 속이 반대일 때가 많다니까.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똥꿈’은 재운(財運)을 예고하는 꿈이기 때문에 한국인..

|컬럼| 430. 멘붕(Men崩)

병동환자 브루스가 틈만 생기면 주장한다. “I am not mental.” - 표준영어로 “I am not mentally ill,” 할 것을 줄여서 하는 말. 자기는 정신병이 없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병동에 체류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서 퇴원을 시켜달라는 압력이다. 병원 말고 딱히 살 곳이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는 환자를 받아주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은 없다. 그도 나도 ‘멘붕’이 일어날 정도다.멘붕은 브루스가 떠들어대는 ‘mental’의 ‘men’과 붕괴(崩壞)의 첫 자의 합성어로서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유행한 말이다. 2012년에 그해 최고의 유행어로 뽑혔다. 정신이 무너지고 깨진다는 뜻. 실성했다, 정신줄이 나갔다, 심하게는 미쳤다는 표현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