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짓 신선한 마음으로 그룹 세션을 시작한다. 이제 새해도 됐으니 혹시 새해 결심을 한 사람이 있느냐, 하며 좌중을 둘러본다. 이런 추상적인 질문에 결코 자발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는 병동 입원 환자들이다.
우리는 매해 정초를 맞이하면 왜 새삼스레 어떤 결심을 하는가. 옛날 옛적, 자그마치 4000여년 전 바빌론 사람들은 해가 바뀌면 남에게 빌린 돈을 갚고 빌린 물건을 돌려주겠다고 신에게 약속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해 결심은 종교적 관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주름잡던 바빌론 사람들에게 있어서 새해 결심은 지키지 않으면 큰 벌을 받는 신과의 언약이었다. 자기 스스로와의 약속이 아닌 엄청나게 무서운 외부적 존재와의 계약이었다.
인류가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근세에 발생한 진화 단계다. 자신과의 약속은 약속 불이행에 대한 처벌이 아예 없거나 경미한 양심의 가책에서 그치는 것이 현대인들의 진면목이다.
새해 결심은 대개 몇개의 인기 사항으로 제한된다. 수년 전부터 가장 흔하게 손꼽히는 새해 결심은 단연 체중감량이다. 얼마 전만 해도 1위를 차지했던 금연을 하겠다는 선언은 흡연자 수가 많이 줄었기 때문인지 이제 별로 큰 인기 품목이 아니다. 4000 여년 전에 견주어 보면 현대판 새해 결심은 남과의 약속 이행이 아니라 자기개발이 대세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막강한 사명감 따위보다 자신의 건강과 외모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개인주의의 발로가 작금의 시대 추세다.
새해 결심을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는 사람들은 미국 인구의 45 프로밖에 안 된다 한다. 그중 성공하는 확률은 겨우 8퍼센트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당신과 내 야코를 죽인다. 우리는 탄식한다. 새해 결심의 실천이 이다지도 힘이 들어서야!
책임감에서 긴장감이 비롯되고 목적의식이 생긴다. 계약서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듯 약속 그 자체는 단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을. 당신과 나의 뇌세포 기능은 뚜렷한 목표를 향하여 눈을 딱 감고 매진할 때 활발해지고 도파민이 방출되어 신바람이 난다. 약속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를 쓰는 행동이 행복의 원천이 된다. 새해 결심을 지키려는 노력은 행복바이러스의 자가생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심(決心)의 ‘결’은 ‘결단할 결’이라 한자사전에 나와있다. 결단(決斷)의 ‘끊을 단’은 섬뜩한 의미를 품고있다. 결심을 내린다는 것은 무엇을 단절하고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좀 파괴적인 요소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체중을 줄이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것은 체중을 불리는 식생활 습관을 단절해야 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체중감량에의 결심은 심장이 약하거나 용기가 없는 사람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New Year’s resolution (새해 결심)’이라는 서구적 습관을 지칭하는 말이 생겨난 것은 18세기 말이라 전해진다. 'resolution'은 원래 14세기에 고대 불어와 라틴어에서 사물을 단순한 형태로 줄이고 삭감한다는 뜻이었다. 16세기에 문제를 해결(解決)한다는 뜻으로 변했다. 문제를 해결할 때도 무엇인가를 단절하고 절단해야 된다는 언어의 귀결이 재미있다.
2020년 정초에 어수선한 한국 정계의 동향을 살핀다. 정치 관계자 몇몇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태도를 공개적으로 바꾼 사태를 음미한다. 고집을 부리기가 십상인 세상에 소신을 바꾸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결심의 결과다. 이들은 지금껏 지켜온 심리적 습관을 마침내 과감하게 단절한 것이다. 용감한 사람들이다.
© 서 량 2020.01.12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1월 15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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