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27. 터프 러브

서 량 2022. 10. 31. 09:38

 

오래 전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사무치게 배웠다. 환자와의 대화는 되도록 비현실적인 각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지혜, 두 인간이 나누는 세속적 대화보다는 정신분석적 원칙을 지키는 특이한 기법을.

 

환자가 스스로 체험하는 의식의 흐름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나 판에 박힌 인사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환자와 제멋대로 수다를 떠는 것은 경범이 아닌 중범죄로 생각한다. 환자를 접하면서 의사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정신과의사는 어딘지 좀 비인간적인 데가 있어야 한다.

 

지도교수는 고지식한 정신분석가였다. 그는 환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직설적인 대화를 ‘football coach approach, 축구코치 어프로치’라 비판한다. 아무런 훈련 없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짓이라는 것.

 

환자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만 베푸는 정신과의사도 어리석다. 다정다감한 미용사, 또는 마음씨 좋은 바텐더 같은 태도는 풋볼코치 어프로치보다 더 심한 경멸의 대상이 된다.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에게 웃는 낯으로 네, 네, 하는 정신과의사란 있을 수 없다.

 

데니스는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좀 뗑깡을 부려도 용서를 받아 마땅하다고 극구 우기는 성격장애자. 마약을 자주 하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한 20대 후반 백인 청년이다. 걸핏하면 병동 공중전화를 때려 부수는 더러운 성미.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신의 반사회적 행동을 미화시킨다.

 

데니스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TLC, tender loving care - 부드러운 사랑의 보살핌’이라고 직원들에게 선포한다. 심리학자가 노여움을 감추지 않으면서 “What you need is self-discipline, not TLC! – 너는 자기 훈련이 필요해, 부드러운 사랑의 보살핌이 아니야!” 하며 반박한다.

 

‘discipline’은 12세기 고대 불어에서 ‘벌을 받다’는 뜻. 전인도 유럽어에서는 ‘take, accept, 취하다, 받아드리다’라는 단순한 의미였다. 그렇다. 무엇을 배우며 훈련을 받는다는 일은 소중한 배움을 받아드리는 마음이 기본자세다.

 

‘discipline’에 힘겨운 ‘군대식 훈련’이라는 뜻이 보태진 시기는 15세기 말.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인류는 무엇을 배운다는 일과가 점점 역겨워진다는 추론이 나온다. 당신과 나 또한 문명의 이기(利器)에 편승하면서 성미가 급해지고 요리조리 힘드는 일을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데.

 

풋볼코치 어프로치보다 훨씬 더 호소력이 강한 ‘tough love, 사나운 사랑’이라는 컨셉이 있다. 알코올리즘과 마약중독 치료에 좋다고 소문난 이 수법은 부드러운 사랑의 보살핌은커녕 중독으로 발생하는 온갖 해로움을 아프게 지적하는 가혹한 태도의 효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TLC’가 아닌 ‘터프’한 접근방식이 통하다니.

 

영화에서 축구코치가 자기편의 승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선수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냅다 퍼붓는 장면을 본다. 마약에 찌든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자친구에게 이럴 거면 헤어지자 하며 협박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차갑기만 하다.

 

우락부락한 축구코치도 눈매 고운 여인도 마음 속 깊은 곳에 강한 애정이 있으면 상대에게 좋은 에너지가 전해지는 법이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메커니즘이 통하지 않는 악질적인 인간들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각성이 뼈아프게 엄습하는 2022년 가을 한복판이다.

 

© 서 량 2022.10.30

뉴욕 중앙일보 2022년 11월 2일 서량의 고정 컬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2/11/01/society/opinion/20221101173117591.html

 

[잠망경] 터프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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