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47. 아내가 모자로 보이다니!

서 량 2022. 11. 9. 18:28

 

-- 시는 고삐가 풀린 감성이 아니라 감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 성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티에스 엘리엇 (1919)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자유연상 기법에 따라 시를 쓰려는 습관을 나는 오랫동안 키워온 것 같다. 어릴 적 처음 글짓기 시간에 지침으로 삼았던 ‘본 대로 느낀 대로’를 지금껏 따르려 한다.

 

무의식 속에 숨겨진 감성과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말하라고 정신분석은 권유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유분방한 생각의 흐름을 시작(詩作)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좀 위험스러운 일이다. 말의 흐름이라는 것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면 소통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감성이 너무 앞을 가리거나 앞장을 서는 말투는 시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감성과 성격뿐만 아니라 생각의 기존체제에서 탈출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나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편이다.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2015)의 사후 출판서, ‘의식의 강물’(The River of Consciousness, 2017)을 읽었다. 그가 뉴욕의대에서 신경과 의사로 지낸 동안 체험한 임상일지를 기록하여 1985년에 출간한 수필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불쑥 기억에 떠오른다.

 

신경과 진료를 마치고 의사에게 의례적인 작별을 고한 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한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자기 머리에 얹기 위하여 손으로 들어올리려고 애를 쓰는 장면을 눈 앞에 그려 보라. 더더구나 환자는 음악학 박사다.

 

올리버 색스는 이 환자가 한 대상의 부분적 요소들을 정확하게 감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는 사람의 눈, 코, 입같은 세부사항을 어김없이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총체적인 인식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미우나 고우나 함께 지내온 아내 얼굴에 대한 기억을 자동적으로 되살리지 못한다. 안과의사는 그의 눈에 안과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시신경이 멀쩡했지만 이미지의 인식 기능이 쑥밭이 된 상태였다.

 

우리들의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눈치’라는 인식 기능이 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순간적 감별력으로 상대의 심리상태나 주변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올리버 색스의 환자는 그런 인지력(認知力)이 바닥을 치는, 정말로 한참 눈치가 없는 위인이었다.

 

올리버 색스는 ‘의식의 강’에서 당신과 나의 의식을 강물의 흐름에 비유한다. 인식과 생각과 의식상태가 철두철미하게 시간적 존재임을 역설하면서 시인 보르헤스(Borges)의 절규에 가까운 말을 인용한다. --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를 휩쓸어 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consciousness, 의식’은 라틴어에서 ‘con(함께)’와 ‘scire(앎)’가 합쳐진 말로써 무엇을 의식하다는 것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남과 함께 앎을 공유(共有)함을 뜻한다. ‘consciousness’는 발음도 비슷한 ‘conscience(양심)’와 말의 뿌리가 같다. 

 

올리버 색스의 환자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헛되고 허위로운 의식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어원학적 차원에서는 비양심적인 마음가짐이었다. ‘본 대로 느낀 대로’를 추종했던 그 음악학 박사는 자신의 잘못된 감각에서 끝내 탈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 서 량 2019.10.06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10월 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19/10/08/society/opinion/7666044.html

 

[잠망경] 아내가 모자로 보이다니!

- 시는 고삐가 풀린 감성이 아니라 감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 성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티에스 엘리엇(1919)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자유연상 기법에 따라 시를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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