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 임의숙 손가락 임의숙 엄지와 엄지를 엮으면 새가 날았다 검지와 검지가 만나면 싸움이 터졌다 중지와 중지가 일어서면 욕설이 나왔다 인지와 인지가 맹세하면 반지가 생겼다 약지와 약지가 묶이면 약속이 되었다 손가락을 모으면 손이다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말씀 하셨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3.12
떡국 / 임의숙 떡국 임의숙 언땅엔 눈이 듬성이고 마당엔 검정고무신 찰지게 질척이는 볏짚단 참새들 왈작지게 장닭 쫒던 털복숭이 강아지 흙담벼락 밑에 졸고 그맘 때 양철지붕 싸락눈 따거운 가래떡 더디게 굳어가는 아랫방 밤을 뛰노는 천장 속 쥐발소리 문풍지 졸린 눈을 뒤척이는 또각 또각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1.26
겨울 비 / 임의숙 겨울 비 임의숙 쌓인 눈이 한 마음으로 사라지는 하늘엔 고운 고운 빗소리 비가 그리울 때가 있어 겨울 속에 내리는 비가. 두껍게 얼은 호수의 문 빗금들이 파르르 안개의 숨들이 하얗게 오르고 주머니 속 꽉 쥐었던 손이 왠지 가벼워지는 왠지 따스해지는 고집이 있어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하늘엔 고운 고운 빗방울 살짝 오래된 안부를 묻고 싶은.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1.18
거울 / 임의숙 거울 임의숙 누구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거울입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거울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 합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당신은 까칠한 수염을 밀고 화사한 화장을 하고 산을 뒤흔드는 웃음으로 쇠를 녹이려는 미소로 마법을 부립니다 치약의 거품..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1.10
겨울나무 / 임의숙 겨울나무 임의숙 나무는 새의 빈 집 한 채 심장으로 달고 살아가는 것이였다 가지와 가지가 서로 부러지지 않도록 굽어지고 휘어져 길을 열어주는 것이였다 나무는 알몸의 지문으로 살갗 음지에 이끼를 피워내는 것이였다 모난 바람 관절을 흔들어 눈송이들 웅 웅 앓는 밤을 지새는 것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12.06
배추밭 / 임의숙 배추밭 임의숙 밤나무 아래 배추밭 찬바람 들어 햇살 식은 지푸라기 질끈 동여맨 손끝을 놓았는지 겹잎들 수그러져 있다 철없이 우거졌던 잡풀들 한 쪽으로 돌아눕고 줄줄이 여물은 실한 포기들 비탈진 고랑들이 한 자루씩 들려보내면 흰나비 길을 따라 고랑들 흩어진다 녹물든 호미손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11.23
이방인의 계절 / 임의숙 이방인의 계절 임의숙 풀벌레의 소리 하얗게 묻어버린 새벽 하늘엔 떫은 별빛이 한쪽으로 차갑습니다 민트향 여운이 감도는 서리의 시간 침묵은 떠 있습니다. 초록의 빛들은 노래였을까요? 울음이였을까요? 노랗고 파랗고 붉었던 나무의 휘파람은 단절되었습니다 풍란의 여름은 청춘으..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11.01
내가 꽃이었다 해도 / 윤지영 내가 꽃이었다 해도 윤지영 꽁꽁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벌어지지 않는 문틈 사이로 한여름의 추위가 들락거리고 밤이 오면 창가에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로 목을 축였습니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찾아와 내게 홀로 피고 홀로 지는 마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번개치는 날에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09.18
가을 / 임의숙 가을 임의숙 가을은 나비 날개에 실은 꽃 한송이 바람에 들지 않는 향기인 것이다 가을은 이슬방울 마른 풀대에 스며드는 빛과 어둠의 고독인 것이다 가을은 밤새 외우는 벌레들의 초록 외마디 지우지 못할 사랑인 것이다 가을은 한잎 한잎 떨구는 새의 눈빛이 그늘 속에 뭉클해지는 것..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09.16
민달팽이 - S에게 / 임의숙 민달팽이 -- S에게 임의숙 물린 젖이 밋밋해지는 동안 쉰 살이 되었다 달시계의 바늘처럼 둥글게 둥글게 닳고 닳으면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 모아두고 쌓아두고 뭉쳐두었던 순간들 어느 봄 날, 홀라당 뒤집어 쓸어냈던 기억 달빛에 웃음이 고이면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