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꽃 / 황재광 사월의 꽃 황재광 I 사월의 마지막 날 꽃이 진다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다 한 겹 두 겹 감미롭게 씁쓸하게 꽃다움에 물들어 꽃들이 껍질(알맹이도 몸통도 없는 것이) 을 벗는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이 수상한 죽음 4월의 연출이 아니다 껍질과 꽃잎 / 알맹이와 쭉정이 오랜 이분법을 꽃이 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4.30
봄 소식 / 임의숙 봄 소식 임의숙 아침 까치의 울음이 되돌아오듯 비닐하우스에 빗소리 흐른다 밀지도 밀리지도 않는 겨울이 망부석으로 앉아있는 겨울이 궁시렁 궁시렁 흙 살이 터진다 갈까 말까 망설임이 반죽 곱게 치댄 진흙 아버지의 고무신에 찰싹 달라붙는다 아침 까치의 울음에 답례를 하듯 두엄..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3.10
첫눈 / 임의숙 첫눈 임의숙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을 앎니다. 솔잎향 가득 담은 소포 하나 받고 싶습니다 위로받고 싶은 아련함이 아픈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투정을 부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없더라도 흩어질 것을 앎니다. 하늘에 수많은 날개짓이 나방의 삶이여서 나는 꽃물든 눈물을 본적이 없습니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2.20
마음 / 임의숙 마음 임의숙 가만히 주머니 속에서 다독이던 말 몇 날 며칠을 넣고 다니던 말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뒤척이던 말 자꾸 한쪽으로 쏠리던 말 덧붙여 꿰매여 놓은 헝겁조각 같은 말 맡아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남의 것 같은 말 어느 날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드는 말 가만히 주머니 속에서 정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1.22
부부 연가 / 임의숙 부부 연가 임의숙 당신과 나, 찬물과 뜨거운 물로 만나 살아가야 하는 집은 수도꼭지 입니다 서로 다른 습성과 버릇 때문에 비좁고 가깝하고 숨통이 조여들어도 우리 감정을 나누며 적당한 온도로 흘러가야 할 시간 입니다 어느 날은 배수구 틈새에 살이 베이고 어느 달은 수문에 갇혀 주..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1.02
맑은 슬픔 / 윤지영 맑은 슬픔 윤지영 길이 끊어졌다 멀리 환하게 보이던 길이 끊어졌다 허공으로 날아간 말들은 어느 하늘밑에서 휘청대고 막다른 길에서 우리는 서로의 입 안 가득 돋은 푸른 멍들을 바라보고 있다 밤새 다듬어 고친 얼굴 새벽강물에 던지고 무향으로 가슴까지 차오르는 코코넛 모카향 모..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10.16
꽃섬 / 임의숙 꽃섬 임의숙 작은 씨앗 하나가 섬이 되었다. 빛이 들어도 바람이 들어도 하늘 하늘 소근거리는 낮은 곳은 낮은데로 기울어진 곳은 절벽끝에서 결지어 부러져도 꽃이라 부른다. 닿지마라 꺾지마라 한송이 무인도. 하루의 꿈 갈라진 틈새로 울다지친 검붉은 향기 둑 둑 두근거리는 생각이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8.02
함박눈 / 윤지영 함박눈 윤지영 세상이 시끄러울 때마다 함박눈이 내렸다 두려움을 숨기려는 듯 바람은 자꾸 눈 사이를 휘젖고 다녔다 눈송이들은 어디론가 흩어지는 듯 했으나 어디에서든 세상을 덮고 있었다 아무것도 쳐부수지 못하는 무력으로 숨죽인 함성으로 우리집 뒤뜰 절벽 같은 의자의 등받이에 매달려 있었다 밤을 견디다 탈선한 철로처럼 휘어진 뼈들이 여전히 우주의 중력과 맞서고 있었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얼굴 위에 찍힌 박자국들은 그냥 얼음이 될까 얼음이 언 땅을 녹이는 소리 갈라진 지도에 다시 시냇물이 흐르고 끊어진 골목들이 같은 언어로 노래하는 우연히 봄이 오는 소리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4.22
봄을 기다리며 / 임의숙 봄을 기다리며 임의숙 창문에서 자란빛이 무성합니다 햇살을 가지런히 펼쳐 빛을 고름니다 얋게 자란 빛은 그늘이 있어 찬기운이 돋아 있고 통통하게 자란 빛은 따가움이 있어 얼굴이 뜨겁습니다 아직은 무지개의 꿈이 들지 않아서 빛은 무 색입니다 골목을 걷는 시선들은 나뭇 가지..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4.16
공백 / 윤영지 공백 윤영지 멈추었네 마음 설레이던 바람의 손길도 속눈썹 어루만지던 햇살도 빗물 가득 머금고 뿌리지도 날아가지도 못한 채 먹먹히 메운 회색 구름 매서운 바람 가시면 마른 가지 끝 초록물 오르겠건만 얼어붙은 시계바늘은 저만치서 그저 바라만 보네. 2017. 3. 18.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