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그리다 / 최양숙 밤을 그리다 최양숙 어둠은 사방에 검은 눈처럼 쌓여 소란했던 동네 소리를 삼킨다 사물이 태어나기 전 태동을 느끼듯 어둠에 감춰진 동네를 살며시 만져본다 한 낮을 두들기던 빛은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가방을 멘 아이들의 어린 발걸음 소리도 다른 차들을 세우던 노란 버스의 권위도 지금은 허..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10.13
자서전을 읽다 / 임의숙 * 자서전을 읽다 임의숙 외 줄 하나에 몸을 감은 저 사내 알파벳의 간판 아래 현기증이 아찔하다 잘못 꾸어진 꿈들이 대서특필된 사건의 진상이 빼곡히 채워진 유리창 "생명보험" 이라는 제목을 달고 구름의 스케치와 먼지들의 결 진 광고가 인쇄된 기사는 옆 건물로 반사돼 복사되었다 빌딩과 빌딩 협..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10.03
다락의 계절 / 최양숙 다락의 계절 최양숙 인생의 다락에 올라 지나간 시간에 떨군 낙엽을 헤쳐본다 켜켜이 쌓여있는 계절 속에 더 이상 뜨겁지 않은 열정이 흐트러져 있다 소중히 감싸 안았던 자랑도 번져가는 물결처럼 얼룩지고 안타까이 쥐어지지 않던 것도 공중에 흩어진 티끌이 되어버렸다 다락은 소리 없이 노래 부..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29
독수리인지 카나리아인지 아니면 붕새인지 / 조성자 독수리인지 카나리아인지 아니면 붕새인지 조성자 십 수 년째 습관적 편두통을 앓고 있는 나 痛의 원인을 찾는 젊은 의사는 피의 내력을 거슬러 오르며 혈소판을 뒤지지만 실체가 좀체 파악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임시변통만 할 수 있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볕 기우는 테라스에 앉아 바람을 쐰다 주기..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28
만토바니 악단의 감미로운 음악은 어디에 있을까 / 조성자 만토바니 악단의 감미로운 음악은 어디에 있을까 조성자 저녁 산책을 마치고 카모마일 차를 마시는 일상의 반복은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니지 만 몸은 습관에 빠져 나른해지길 좋아하지 하늘이 수굿하게 땅으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기억은 롤리팝처럼 달큰하게 녹아내리지 멀어져간 생의 가변엔 풍경..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24
딱따구리 / 최양숙 딱따구리 최양숙 빈 방에 앉아 창 밖을 본다 창 너머 솟아있는 은사시나무에 둥지가 비어있다 이젠 허물만 남은 딸의 방처럼 머리와 부리로 피를 튀어야 종족이 보존되는 운명 천적을 피해 우듬지로 올라 단단한 나무를 뚫기 위해 부리 끝으로 후려쳐내면 부서져 떨어지는 나무 살 나무를 부여잡은 발..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17
청바지 / 임의숙 청바지 임의숙 창공과 나 사이 자동으로 열리는 문 꾹 꾹 접혀있던 나이들 따라 내려가다 보면 푸른 방이 있다 청바지가 입고 싶다 주머니 속 보푸라기 뭉치들 톡 톡 청포도 알로 터져도 오늘은 슬프지 않을 것 같아 좋은 소식도 있을 것 같다 천사 표 날개라도 손에 쥔 듯 까르르 쓰러지는 새들의 도미..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15
Irene / 송 진 Irene 송 진 숨결을 고르고 한결 부드러운 이름으로 변장했으리란 낌새는 느꼈지만 그렇게 많은 눈물로 펑펑 몰아칠 줄이야 그동안 벼려온 네 비수의 섬광이 세상을 향한다 해도 미련은 일말의 희망을 지울 수 없어 어떤 간판은 자책이라고 고쳐 쓰기도 했다 먹장 구름 떼가 황망히 몰려가는 곳, 추억의..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13
탱고 추실까요? / 조성자 탱고 추실까요? 조성자 복숭아 한 입 베어 물자 과즙이 된 햇빛이 팝페라 가수의 노래처럼 튀어 나온다 내가 끌고 온 나를 끌고 가는 불면의 시간이 길어진 그림자를 밀며 멀어진다 후렴처럼 바람은 건들댄다 반복되는 것들의 권태가 증식되는 팔월 을 배웅하고 난 뒤의 적막은 길다 시간은 알몸으로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05
포도송이 / 임의숙 포도송이 임의숙 한 계절이 마른 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곳에는 잊은 기억들이 모여 산다 눈을 가리면 세상은 빈 상자. 고무줄을 띄는 계집아이의 파랑 치마 밑으로 튕겨진 빛의 빨간 꽃잎이 피기 전에 아이는 엄마를 잃었다. 소리 없이 너는 자라고 자궁 속 태줄 타고 올라 온 푸른 손바닥 설렘으로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