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거리에 서서
최양숙
혜화동, 원남동
비원 앞을 거쳐
들어가는 재동 골목
40년 전 처음 만났던
그 거리에 서서
여학교 교복을 입는다
흰 카라를 빳빳이 세우고
베레모를 쓴다
옛 교정에 남은 것이라곤
천연기념물 8호 백송 한 그루
600년 수령을 지나는 동안
지났을 수많은 장면들
희끗한 수피 비늘 한 장마다
기억의 메모장을 들춘다
궁궐과 도심을 가르는
비원 담장 기와는
재잘거리는 동무들의 목소리로
기침을 토해내고
창경원 벚꽃은
밤의 수은등에 녹아
젊은 날의 혈관을 밝힌다
만개한 꽃잎 속에
희망도 좌절도 감춰지고
부서져 날리는 꽃잎은
태연을 가장한다.
길을 메운 차들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데
시대의 숨소리를 가득 채워
모두가 앞으로 향할 때
강물을 헤쳐 오르는 연어처럼
차의 행렬을 거스른다
단발머리 여학생들을 쏟아내던
버스를 찾아본다
봄 날 거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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