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양커스 기자회견 / 김정기

양커스 기자회견 김정기 바람에 마지막 번지를 둔 오늘도 우리 집 돌계단엔 꽃잎이 쌓입니다 그 무거운 외로움을 입술에 물고서 상처에 싹을 키우는 말없는 언어에 귀를 엽니다 나뭇가지위에서 선잠을 자고 지도에도 없는 강물을 밟고 오실 때도 어깨를 누르는 돌무더기 당신이 말없이 받아줄 때도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모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언제나 길 없는 땅에 길을 내고 따뜻한 것만 모여 사는 마을로 나를 데리고 갔지요 우리가 버렸던 사투리들이 몰려와서도 자꾸만 외면하는 사랑이라는 단어 끝내 알고 있는 당신을 가리고 마는 내 손바닥 몸을 숨길수록 드러나는 꿈속의 얼굴 머리칼만 보이는 미로의 연속입니다 영커스 기자회견은 무산되었습니다 © 김정기 2013.05.26

제5 계절 / 김정기

제5 계절 김정기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어두움의 겹겹에서 창백한 겨울이 떠나고 있다 봄이 오기 전 2월은 제5 계절이다 어떤 사람에게나 당도하는 창호지 물에 젖은 껍질들 탄력 없는 살갗이 매운 바람에 흐느적거린다 상 모서리 뽀얀 먼지 틈에 튕겨 떨어진 옛날 한 조각이 나팔을 분다 감추어진 부끄러움 하나 아직도 스며들어 품안에서 녹고 있다 독일에서 온 편지에 겨울을 견딘 제5 계절이 유럽의 축제란다 다음에 장미 주일, 퇴각하는 겨울의 마지막 비명이 들린다 이제 부활의 꽃들과 성처녀를 기다리는 햇살에 찔리며 날아가는 꽃잎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나도 날아오른다 진 남빛 나라를 향해 © 김정기 2011.02.12

나무를 베는 사람 / 김정기

나무를 베는 사람 김정기 날마다 나무가 쓸어진다 날카로운 전기톱에 소리도 못 지르고 쓸어진다 가끔 물위에 떠오르는 나무 가지를 건지며 그가 물 속에서도 톱질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래도록 나무를 베면서 나무냄새 외에는 맡지 못해도 그는 언제나 고요하고 환하다 아주까리 꽃대궁이 솟아 오르던 날 저녁 나무들은 모조리 베어지고 톱밥이 온통 마을을 덮는데 그는 여전히 빛나는 톱을 들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나무를 벤 자리에 새 움이 돋고 숲을 이루어도 그 사람은 계속 나무를 벤다 멀리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푸르다 그는 나무다 가까이서 보는 그는 날선 톱이다 오늘도 바람으로 나르며 나무를 벤다 © 김정기 2010.05.17

연두가 초록에게 / 김정기

연두가 초록에게 김정기 무릎 위로 꽃잎이 날아든다 내 자리를 비워 줄 차례를 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버티려 한다 사는 것이 어디 길가는 것처럼 되더냐 초록은 연두를 몰아낸다 하늘을 입에 문 초록은 잘 가라고 말한다 연두는 초록에게 막바지에 당신의 색깔이 파열될 때 나를 그리워하지 말라 나는 절벽을 걸어 내려간다 온 누리의 바람이 내 옷 깃에 스며들고 나는 새털같이 가벼워진다 무거운 초록을 입히지 않은 진득한 유월에 닿지 않은 몸으로 시간을 건너가는 눈부심으로 유유히 절벽을 내려간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의 긴 손을 잡고 © 김정기 2010.05.05

2월의 눈물 / 김정기

2월의 눈물 김정기 4번 지하철은 흔들렸다 구석 자리에서 두꺼운 책을 펴 들고 책머리를 읽다가 울기 시작했다 젊은 평론가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몰락하는 자가 지는 것 같으나 결국 이긴다는. 하나를 위해 열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표정은 숭고하면서도 순간 절정이 보인다고 지면서도 이기는 그들이 지킨 하나는 아무도 파괴하지 못한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글발을 보며 눈물 흘리는 나는 앞자리 흑인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겨울을 잘 통과한 제5 계절, 2월의 눈물이 양키 스타디움 역에서 축제로 열리려는 듯 문으로 부드러운 안개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 잠시 기차는 서고 얼룩진 책 귀퉁이를 어루만졌다 © 김정기 2010.02.10

지구에 없는 사람 / 김정기

지구에 없는 사람 김정기 꼭두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오대양 육대주에 산맥마다 바다마다 뒤져보아도 도시나 촌락, 골목마다 집집마다 살펴보아도 유엔빌딩 사무실 문을 열어도 우리 교회 앞자리 셋째 줄에도 곤 색 양복에 자주색 넥타이 달이 지고 해가 떠도* 산맥이 뻗어가고 바다가 넘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월남의 백마부대 다낭 항구에도 오끼나와 정보학교 교정에도 종로5가166번지 본적지에도 태극기 휘날리던 3사단 연병장에도 수색대를 풀어 놓았지만 찾을 수 없단다.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땅 위에 바다 속에 현미경을 들고 나서 보다가 이제는 내가 지구의 옷을 벗고 천사의 날개 달고 창공을 날아 거기서 보았다. 만났다. 지구에 없는 사람을. *졸시 “당신의 군복..

밤기차를 타고 / 김정기

밤기차를 타고 김정기 바람에 덜미 잡혀 밤기차를 타고 떠나는 늦여름 저녁 아홉시 반 그대 머리칼에 나부끼는 진고동색 윤기가 챙 넓은 모자 속에서 숨죽이고 있네 개칠한 무늬 같은 죽은 깨 몇 알 콧날 위에서 흘러내려오고 가두었던 시간 어두움과 버무려 포로롱 풀려나는 멧새가 되네. 차창에 내린 커튼 젖히고 적막과 만나는 그대 아메리카의 땅 냄새를 싣고 가는 밤기차를 타고. 때로 뱃속에서 꿈틀대는 화냥끼를 명품가게에서 산 옷 한 벌을 우리 집 정원에서 자란 청청한 소나무를 그 삭을 줄 모르는 끈끈한 송진 냄새를 부윰하게 떠오르는 山麓을 향해 던지며 던지면서 내던지면서 오늘도 밤기차를 타고. © 김정기 2009.08.30

여름 / 김정기

여름 김정기 닫힌다 잠구어진다 한땀씩 꿰매진다 막이 내린다 그래도 열고 돌리고 뜯고 창밖에 잣나무 우듬지를 꺾는다 구겨지며 오르는 막이 어설퍼도 무대는 황홀하다 들꽃들. 넝쿨도 열매도 자라고 떠나간 사람도 여름을 열러 닫혔던 고요를 딛고 현관을 연다 허공은 포효하고 헤매던 땅이 열린다 조금씩 여름이 떠나가고있다. © 김정기 2020.07.31

꽃 없는 봄날 / 김정기

꽃 없는 봄날 김정기 꽃 없는 봄날도 간다 다른 별에서 온 꽃이라는 이름표 달고 나무마다 색깔대로 피어 있다 누구와도 손잡으면 큰일나는 플라스틱 먼지로 뭉친 꽃 시간 지나면 녹는 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앓아 누운 뉴욕에 봄날은 간다 사방은 광야로 변신하여 모랫벌에 물도 없이 사람마저 없는 세상엔 꽃이 있을리 없다 차 없는 광장은 넓기만 하고 인적 드문 길은 멀기만 하다 봄 햇살은 설레지도 빛나지도 않는 잿빛 그래도 부르면 어디서나 대답하는 친구의 목소리 가시 넝쿨 흙더미에도 목마르지 않게 아프지 않게 꽃 없는 봄날을 조심조심 벗어버린다 © 김정기 202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