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한겨울* 내 겨울은 얼음장 사랑이다 휘영청 달밤 강물에 떠나가는 사다리꼴 얼음판 쪼가리다 무심코 만지면 쩍쩍 달라 붙어 살점 뚝뚝 떨어지는 차마 눈 뜨고 못 보는 슬픔이다 내 겨울 얼굴은 동물 사랑이다 투실투실한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새파랗게 얼어붙은 눈송이로 나뭇가지 잔가지에 매.. 詩 2007.12.16
|詩| 숨바꼭질** 술래가 시들해져서 숨바꼭질 도중에 훌쩍 집에 가 버린다면 큰일이다 정말 술래한테 잡히기를 기다리며 술래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환상으로 허벅지에 왕소름이 쑥쑥 솟는 사이에 해는 서산에 지고 당신 이마에도 시커먼 땅거미 지고, 아직도 보인다 거무죽죽한 겨울 나무들 꼼짝달싹하.. 詩 2007.12.11
|詩| 양파와 눈송이 당신은 팍팍한 양파와 빨간 고춧가루를 밝힌다 양파와 고춧가루만으로 살 수는 없지 자장면도 울면도 기스면도 양념 맛으로만은 어제 밤에 눈이 내렸어 눈은 무자비하게 희다 양파보다 훨씬 더 순결을 가장하고 눈이 내숭을 떨고 있어요 중국집에도 이탤리언 레스트랑에도 눈이 폭포수.. 詩 2007.12.08
|詩| 트럼펫 콘체르토** 십자군 전쟁 때 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를 죽여대던 시대 싸늘한 밤중에 울리는 트럼펫 소리 지금도 내 대퇴근이 후끈거리는 그 옛날 그 아늑함이 겨울 아침 출근 길에 트럼펫 독주가 시원하기만 해라 은회색 철갑의 투구를 뒤집어 쓴 십자군들이 푹푹 쓰러지면서 그들의 나약한 피부.. 詩 2007.12.05
|詩| 오래 생각하는 이순신 김형 가끔 이곳 케이블 티비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티비 연속극을 봅니다 얘기 줄거리도 잘 모르면서 그냥 이순신이가 마음에 들고 불쌍해서 봅니다 그러나 김형 나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겉으로 이순신이를 숭상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이 드는 걸 어쩌면 좋겠소 그것도 어떤 듬직한 딴 .. 詩 2007.12.03
|詩| 밝은 회색** 아침에 해가 뜨고 좀 있다가 하늘이 은박지처럼 밝은 회색이 되는 걸 보았지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보면 홀연히 사라지는 빛, 그리고 기러기처럼 너울너울 기분 좋게 날아가는 저 구름 떼를 좀 보라니까요 숨 한 번 훅 내뿜는 순간 나는 덜렁 구름을 올라타고 흰 수염이 명치끝까지 내.. 詩 2007.11.30
|詩| 왕과 詩人 빛과 시간과 왕과 詩人이 끼리끼리 히히덕거리는 사이에 몇 세기가 흘러가구요 은하수 별가루도 한 반쯤으로 줄어들구요 거죽이 무지개빛으로 휘황찬란한 휘발유 가격이 우주를 향하여 두 배 세 배로 솟구치구요 사랑의 횃불을 치켜든 낭만파 왕과 詩人들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 詩 2007.11.28
|詩| 월동준비 시커먼 구공탄 또는 조개탄 위에 내려앉자 마자 새하얀 눈이 금세 녹아 없어진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도 금세 녹아 없어지듯 11월에는 공기가 얼어붙어 우주가 얼어붙어 사랑이 얼어붙어 봄이 올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눈 앞에 눈발이 요술처럼 서성대.. 詩 2007.11.24
|詩| 공상과학 시대** 스타워즈에 나오는, 이를테면 머리에 뿔이 났거나 배불뚝이, 몸이 커다란 괴물이 주먹만한 눈을 껌벅거리며 당신을 쳐다본다고 쳐. 그놈 눈이 하도 큰 바람에 그놈 망막에 비친 당신 얼굴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여권사진처럼 뚜렷이 보인다고 쳐. 그 이상한 괴물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 詩 2007.11.21
|詩| 뜨거움* 뜨거움이 나를 떠남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걸 나 깜박 잊어버렸지 뻔뻔스럽게도 청춘을 돌려달라며 소리치는 나훈아 구성진 유행가가 우리들 이마를 후줄근하게 때리는 순간조차 이제는 홀연히 가고 없고 칙칙한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는 여름 밤이며 연꽃보다 찬란한 가을 아침이며 .. 詩 2007.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