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밝은 회색** 아침에 해가 뜨고 좀 있다가 하늘이 은박지처럼 밝은 회색이 되는 걸 보았지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보면 홀연히 사라지는 빛, 그리고 기러기처럼 너울너울 기분 좋게 날아가는 저 구름 떼를 좀 보라니까요 숨 한 번 훅 내뿜는 순간 나는 덜렁 구름을 올라타고 흰 수염이 명치끝까지 내.. 詩 2007.11.30
|詩| 왕과 詩人 빛과 시간과 왕과 詩人이 끼리끼리 히히덕거리는 사이에 몇 세기가 흘러가구요 은하수 별가루도 한 반쯤으로 줄어들구요 거죽이 무지개빛으로 휘황찬란한 휘발유 가격이 우주를 향하여 두 배 세 배로 솟구치구요 사랑의 횃불을 치켜든 낭만파 왕과 詩人들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 詩 2007.11.28
|詩| 월동준비 시커먼 구공탄 또는 조개탄 위에 내려앉자 마자 새하얀 눈이 금세 녹아 없어진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도 금세 녹아 없어지듯 11월에는 공기가 얼어붙어 우주가 얼어붙어 사랑이 얼어붙어 봄이 올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눈 앞에 눈발이 요술처럼 서성대.. 詩 2007.11.24
|詩| 공상과학 시대** 스타워즈에 나오는, 이를테면 머리에 뿔이 났거나 배불뚝이, 몸이 커다란 괴물이 주먹만한 눈을 껌벅거리며 당신을 쳐다본다고 쳐. 그놈 눈이 하도 큰 바람에 그놈 망막에 비친 당신 얼굴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여권사진처럼 뚜렷이 보인다고 쳐. 그 이상한 괴물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 詩 2007.11.21
|詩| 뜨거움* 뜨거움이 나를 떠남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걸 나 깜박 잊어버렸지 뻔뻔스럽게도 청춘을 돌려달라며 소리치는 나훈아 구성진 유행가가 우리들 이마를 후줄근하게 때리는 순간조차 이제는 홀연히 가고 없고 칙칙한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는 여름 밤이며 연꽃보다 찬란한 가을 아침이며 .. 詩 2007.11.16
|詩| 욕정 혹은 동정 감기 들겠다 웃통을 냉큼 벗어 던진 맨 어깨 맨 가슴 맨 살 부드럽게 약간 부드럽게 진저리 치는 추위의 일거수일투족을 도무지 예상하지 못하지 당신은 물색을 몰라 하는 복숭아 짙푸른 낙엽 수정 같은 고드름일랑 비바람하며 눈보라하며 봄 겨울 늦가을 체감온도에 관계 없이 당신 정말 감기 들겠다.. 詩 2007.11.14
|詩| 바지 주름살 내 바지가 옷걸이에 걸려 접혀 있다 무릎 뒤쪽으로 주름이 많이 잡혔네 무릎은 멀쩡한데 정강이 구김살이 야산(野山)처럼 우글쭈글 널려 있네 생각 모서리를 직각으로 세우고 종일토록 의자에 앉아 짓뭉개는 내 마음 윤곽이 저런 모습일 줄이야 구김살 많은 내 심사 주말에 당신 몰래 세탁소에 맡겼다.. 詩 2007.11.12
|詩| 할렘* 대낮에도 맨해튼 북부 할렘에 들어서면 어둡다 사람들이 집 앞 층계에 걸터앉아 하늘과 땅의 틈서리를 가늠질하는 할렘에 들어서면 나는 느슨해진다 할렘의 황혼을 상상하지 못한다 내 생명의 빛이 엷어질 즈음 당신이 와사비 냄새 흥건한 어느 일본 레스트랑에서 사시미라도 먹으면서 .. 詩 2007.11.09
|詩| 사과 과잉 당신의 하드 드라이브 용량은 얼마나 되나요 퇴근길에 내 앞뒤로 차량들이 버글거렸다 선량한 운전수들끼리 충돌해서 응급차가 달려오고 선량한 경찰들이 뒤늦게 도착하고 신(神)이 사랑의 가래침을 듬뿍 뱉어 놓은 금단의 열매가 경련하는 당신의 무의식 이차선 도로에 내 유년기 잊혀.. 詩 2007.11.06
|詩| 갈증에 관한 詩 詩를 주물럭거리다 지쳐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하다가 내쳐 잤지 세 시간쯤 지나 벌떡 일어나 목이 샌드페이퍼처럼 칼칼해서 물 마시고 의자에 앉아 꼼짝달싹하지 않는 벽을 노려본다 밤이면 밤마다 내 詩의 기분을 풀어주는 창 밖의 달 처음에 복숭아 빛이었다가 나중에 샛노란 국화 빛으로 詩 .. 詩 2007.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