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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봄의 광끼*

우리들끼리 말이지만 새 봄에는 뭐든지 가능하대요 아까 종려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걸 봤어요 싱싱한 물구나무서기 종달새 쯤은 저리 가라는 거에요 걔네들이 아무리 비상력이 좋다지만 봄에는 또 돌멩이건 지난 가을에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들이고 다 덜렁덜렁 들뜨는 법이래 이놈들이 덜렁덜렁 들뜬다 해서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도 아니야! 하며 내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도 시종일관 막무가내라 시방 저도 봄의 광끼에 몸을 맡겨볼까 하는데, 어때요? © 서 량 2008.04.18

2008.04.19

|詩| 남녀, 혹은 종려나무

남자건 여자건 종려나무건 그렇게 키가 크면 우선 좀 싱거워 뵌대 왜 있지 작은 고추가 맵대 사람이건 황새건 기린이건 키가 크면 땅바닥에 있는 아담하고 우아한 것들이 눈에 잘 뵈지 않는대 눈과 땅과의 거리가 머니까 당연하대나 사랑하는 남자가 너무너무 그리워서 몸이 수척해진 얼굴이 갸름하거나 통통한 여자가 뚝뚝 흘린 눈물자죽이나 저 혼자 공연히 절망하는 남자가 탁! 뱉은 가래침 같은 것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는 거야 눈이 저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당신과 나와 이 축축한 대지 위에 아담한 토담집 한 채 지어 놓고 같이 살고 싶어요 드높은 구름을 향한 목타는 함성 대신에 먼 우주의 정기가 내 허파꽈리를 나긋나긋하게 애무해 주기를 막연히 원하는 대신에 당신과 내가 등허리 따스한 구들장 아랫목에 아무때나 누워서 킬..

2008.04.03

|詩| 짐승들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짐승이라는 생각을 했어 나 고상하지 않거들랑 교회에도 안 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량한 생각을 한다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모두가 다 그렇잖아요 야자수 나무 밑 자리는 순수한 짐승들만 입장권이 있대 눈이 살쾡이처럼 사납게 생겼지만 다산 정약용은 평생을 푸짐한 야자수 밑에 마음 편하게 다리 쭉 뻗고 누워 본적이 없대 정약용도 짐승 같은 인간이었을 걸 내 짐작에 아마 저 눈매 좀 봐봐 째려보는 눈초리가 성질 깨나 있게 생겼어 너 이놈! 하면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세요, 혹시 © 서 량 2008.04.01

2008.04.02

|詩| 봄이 울고 있다

봄이 혼자 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 봄은 공연히 무서워서 울기도 하지만 제풀에 혼자 좋아서 우는 수도 많대 겨울 내내 쌓이고 쌓인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들이 고놈의 뾰족뾰족한 고드름들이 질질 녹을 즈음 봄에는 개구락지건 종달새건 미나리건 민들레건 줄곧 울어댄대 나도 당신도 같이 울어 볼까 핏덩어리 볼기짝을 탁! 때리면 갓난아기가 소스라치게 울듯 그렇게 으앙! 하면서 우리는 울어도 좋아 진짜야 우리가 봄이 아니면 인제 언제 울겠어 한 여름에 우는 건 말도 안돼 날씨가 텁텁해지면 우리 감성이 드라이해진대 사랑은 봄이나 가을에 태어나야 해 그것도 봄에 함초롬히 솟아나는 새파란 새순이라야 제격이래 © 서 량 2008.03.04

2008.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