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맥박에 대한 극심한 유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어느날 개구리 해부를 했지 왜 날카로운 수술칼 아래 개구리 염통이 불끈불끈 뛰는 걸 보고 내 염통도 이렇게 뛸거야 했지 왜 나중에 꽃에도 돌에도 염통이 불끈거리는 걸 봤다 아니 거진 본 것 같았어 초생달의 맥박 깻닢의 박하향 맥박 아 그리고 당신의 동공에 .. 詩 2008.04.30
|詩| 왜, 왜, 왜?*** 4월 내내 아침 7시 반에 그리고 저녁 5시 반에 서재 밖 떡갈나무 변성기를 금방 넘은 푸릇푸릇한 나뭇가지 그림자 속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운다 기쁘게 노래한다 매일 같은 새 한 마리 왜? 왜? 왜? 하며 월츠로 나오다가 왜? 왜? 왜? 왜? 하며 위풍당당한 행진곡 박자로 나를 짓밟는다 이.. 詩 2008.04.26
|詩| 어둡고 화려한, 그런 꽃 같은*** 고향이 날 사랑한다기보다 고향은 내 사랑을 받기 위해 입때껏 살아있는 추상에 지나지 않아 고향이 살금살금 사라지는 추상이라니요 씻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오로지 기억 속에만 화석으로 꽉 박혀있는 고향 산들바람 부는 날 어둡고 화려한 그런 꽃 같은 고향이다 동화책에 나올 법.. 詩 2008.04.23
|詩| 봄의 광끼* 우리들끼리 말이지만 새 봄에는 뭐든지 가능하대요 아까 종려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걸 봤어요 싱싱한 물구나무서기 종달새 쯤은 저리 가라는 거에요 걔네들이 아무리 비상력이 좋다지만 봄에는 또 돌멩이건 지난 가을에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들이고 다 덜렁덜렁 들뜨는 법이래 이놈들이 덜렁덜렁 들뜬다 해서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도 아니야! 하며 내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도 시종일관 막무가내라 시방 저도 봄의 광끼에 몸을 맡겨볼까 하는데, 어때요? © 서 량 2008.04.18 詩 2008.04.19
|詩| 다른 시인을 모방하다 되도록 참신한 표현을 하겠다는 결심도 무너지고 나는 이제 좋아 뵈는 시와 좋아하는 시인을 흉내내려 한다. 전에도 목에 핏대를 올리고 말한 적이 있지만 예술은 모방이다. 화려한 꽃들도 어마어마한 나무들도 소문난 도둑들도 유명한 시인들도 성실한 의사들도 조지부시도 이명박이도.. 詩 2008.04.08
|詩| 남녀, 혹은 종려나무 남자건 여자건 종려나무건 그렇게 키가 크면 우선 좀 싱거워 뵌대 왜 있지 작은 고추가 맵대 사람이건 황새건 기린이건 키가 크면 땅바닥에 있는 아담하고 우아한 것들이 눈에 잘 뵈지 않는대 눈과 땅과의 거리가 머니까 당연하대나 사랑하는 남자가 너무너무 그리워서 몸이 수척해진 얼굴이 갸름하거나 통통한 여자가 뚝뚝 흘린 눈물자죽이나 저 혼자 공연히 절망하는 남자가 탁! 뱉은 가래침 같은 것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는 거야 눈이 저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당신과 나와 이 축축한 대지 위에 아담한 토담집 한 채 지어 놓고 같이 살고 싶어요 드높은 구름을 향한 목타는 함성 대신에 먼 우주의 정기가 내 허파꽈리를 나긋나긋하게 애무해 주기를 막연히 원하는 대신에 당신과 내가 등허리 따스한 구들장 아랫목에 아무때나 누워서 킬.. 詩 2008.04.03
|詩| 짐승들 어느 날 아침에 내가 짐승이라는 생각을 했어 나 고상하지 않거들랑 교회에도 안 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량한 생각을 한다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모두가 다 그렇잖아요 야자수 나무 밑 자리는 순수한 짐승들만 입장권이 있대 눈이 살쾡이처럼 사납게 생겼지만 다산 정약용은 평생을 푸짐한 야자수 밑에 마음 편하게 다리 쭉 뻗고 누워 본적이 없대 정약용도 짐승 같은 인간이었을 걸 내 짐작에 아마 저 눈매 좀 봐봐 째려보는 눈초리가 성질 깨나 있게 생겼어 너 이놈! 하면 오금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세요, 혹시 © 서 량 2008.04.01 詩 2008.04.02
|詩| 빵의 생리*** 빵이 내게 먹히기를 바라는 말랑말랑한 빵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주 순수한 표정 빵이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생물이라는 느낌이라니 가설이라고 밀어붙이지 말아요 빵이 성질이 좀 급하다는 생각도 했어 빵은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내 입안에서 살살 여유 있.. 詩 2008.03.29
|詩| 존재의 노래 나는 어디에나 언제까지나 존재한다 더러운 하수구에도 청순한 구름 건너 쪽에도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우주 구석구석 틈새마다 두루두루 산재한다 언제까지나 나는 무엇인가 내가 진짜 무엇인지 당신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겠지 나도 그렇다 나를 무색무취의 공기라고 추정해 봐 하.. 詩 2008.03.22
|詩| 가래떡* 음력설 하루 전에 떡방아간에 가서 가래떡을 뽑아 온다 나 보다 8살 위 이모와 함께 이른 새벽에 피혁이 허연 쇳덩어리를 이리쿵덕 저리쿵덕 단단히 감싸고 빙글빙글 둔하게 돌아가는 사이에 새하얀 가래떡이 구질구질하게 기계 항문을 빠져나와 다라이 속으로 쑥쑥 들어간다 냄새가 아.. 詩 2008.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