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만보(慢步) 가을이 속보로 행진하고 있어요 바람결에 휙휙 정신 없이 뛰어가네요 나는 가을의 도망질에 반항을 해야겠어요 내 거역감은 만보(慢步)하는 데서 힘있게 솟아납니다 나는 세상에 있는 시간이라는 시간은 다 내것처럼 여유작작하게 가을을 휘적휘적 뒤쫓아가렵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 詩 2008.11.06
|詩| 여우 이야기** 여우는 순 시각현상이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우는 코스모스도 함박꽃도 다 변덕쟁이라던데 여우를 놓고 빗물 듬뿍 머금은 구름들하고 팔 다리 몽실몽실한 로마 신들이 오래 전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대 "여우를 어쩌지?" 하면서 화창한 대낮에 간간 비가 펑펑 쏟아졌다 구름이 한눈을.. 詩 2008.10.21
|詩| 서재의 홍수 컴퓨터가 으릉으릉 작동하는 만큼 사이버 공간은 버젓한 현실이에요 거기에는 푸른 초원 비키니 차림의 금발미녀 새빨간 낙엽 그리고 한 없이 비상하는 새들이 있어요 당신이 거기를 잠옷바람으로 훨훨 날아다니네요 마우스 버튼이 딸각거리는 박자에 맞춰 당신 몸이 1280 by 1024 설정의 .. 詩 2008.10.17
|詩| 가을의 난동 심지어 가을은 광활한 우주와 깨알만한 은하수까지 속속들이 장악했다는 거에요 무자비한 점령군처럼 완강한 기력입니다 가을 앞에서 떡갈나무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민첩하게 옷을 벗습니다 잎새들의 짠한 추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전신이 오렌지색 황혼 빛으로 착색됩니다 잎.. 詩 2008.10.15
|詩| 함박눈, 책갈피, 그리고 장미* 차곡차곡 쌓이고 또 쌓여서 포근한 양털 융단이 되는 앞마당입니다 함박눈이 함박눈 위에 켜켜이 얹히는 중량감이지요 끝이 날카로운 책갈피의 반듯한 직사각형안에 차츰 씩 누적되는 따스한 지식이지요 지식이 겹치고 또 겹치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저 부드러운 곡선의 비밀 장미 꽃잎.. 詩 2008.10.14
|詩| 첩첩 산중 꿈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 속에서 또 꿈을 꾸다가 꿈들이 겹겹이 가냘픈 장미 꽃잎처럼 서로를 첩첩이 에워싸고 제각각 소망을 내세우며 새벽 이슬 차가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다니 당신 심성이 장미라고야 함부로 말 못하지 차분한 생각도 덤벙대는 욕망도 하나씩 속에 하나씩들 더 있고 그 바닥으로 당신이 미처 눈치 못 채는 사유와 소망이 도처에 흩어져 속속들이 숨어 있다니 꿈의 그림자를 일일이 다 분석하려고 파고들자니 끝도 없고 정신도 없어진다더니 정말 정말이라니 © 서 량 2008.10.09 詩 2008.10.09
|詩| 금성에서 자라는 나무들 샛별에는 풀도 잡초도 자라고 거북이며 미꾸라지들이 하여튼 간에 학자들이 미처 TV로 보여주지 못한 깊은 우주 속 알맞게 후미진 곳 샛별에는 비너스만큼 강인한 영혼들이 득실댄다는 소문을 들었어 어제 새벽에 샛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 동안 금성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 詩 2008.10.06
|詩| 오 대니 보이 제목도 얘기 줄거리도 모르면서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에 보는 둥 마는 둥 한 케이블티브이 영화가 있었지 신선한 흙을 갓 덮은 무덤 앞 장례식에서 키 큰 남자들 여럿이 굵은 목소리로 오 대니 보이를 노래했어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 詩 2008.10.03
|詩| 달과 나** 달과 내가 아무도 없는 밤하늘에서 정을 통하는 게 얼마나 신바람이 나는 일이냐 저 눈매 깔끔한 달 여인이 워낙 벙어리라서, 벙어리라서 나도 덩달아 순 벙어리로 춤을 춘다 꾸불꾸불한 팔다리를 더욱 더 꾸불텅꾸불텅하게 내 어릴 적 밝은 밤 앞마당 도리깨처럼 깡마른 키가 추녀 끝에 닿도록 하늘로 쿵쿵 뛰어오르는 낯 익은 그림자 하나 달밤에 우는 사람 마음은 달밤에 울어 봤던 사람만 안다 © 서 량 2008.09.28 詩 2008.09.29
|詩| 가을과 클라리넷 밝음도 뜨거움도 견디지 못하는 소식 가을이 오면 무턱대고 몸을 푸는 악기 Benny Goodman이 연주한 스윙재즈 Memories of You를 반 소절씩 늦게 따라 같이 분다 나보다 수년 전에 태어나서 나보다 훨씬 후에까지 살아 남을 살가운 음악 감히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청각 감각 모르겠다 가을이면 가.. 詩 2008.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