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금성에서 자라는 나무들 샛별에는 풀도 잡초도 자라고 거북이며 미꾸라지들이 하여튼 간에 학자들이 미처 TV로 보여주지 못한 깊은 우주 속 알맞게 후미진 곳 샛별에는 비너스만큼 강인한 영혼들이 득실댄다는 소문을 들었어 어제 새벽에 샛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 동안 금성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 詩 2008.10.06
|詩| 오 대니 보이 제목도 얘기 줄거리도 모르면서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에 보는 둥 마는 둥 한 케이블티브이 영화가 있었지 신선한 흙을 갓 덮은 무덤 앞 장례식에서 키 큰 남자들 여럿이 굵은 목소리로 오 대니 보이를 노래했어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 詩 2008.10.03
|詩| 달과 나** 달과 내가 아무도 없는 밤하늘에서 정을 통하는 게 얼마나 신바람이 나는 일이냐 저 눈매 깔끔한 달 여인이 워낙 벙어리라서, 벙어리라서 나도 덩달아 순 벙어리로 춤을 춘다 꾸불꾸불한 팔다리를 더욱 더 꾸불텅꾸불텅하게 내 어릴 적 밝은 밤 앞마당 도리깨처럼 깡마른 키가 추녀 끝에 닿도록 하늘로 쿵쿵 뛰어오르는 낯 익은 그림자 하나 달밤에 우는 사람 마음은 달밤에 울어 봤던 사람만 안다 © 서 량 2008.09.28 詩 2008.09.29
|詩| 가을과 클라리넷 밝음도 뜨거움도 견디지 못하는 소식 가을이 오면 무턱대고 몸을 푸는 악기 Benny Goodman이 연주한 스윙재즈 Memories of You를 반 소절씩 늦게 따라 같이 분다 나보다 수년 전에 태어나서 나보다 훨씬 후에까지 살아 남을 살가운 음악 감히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청각 감각 모르겠다 가을이면 가.. 詩 2008.09.25
|詩| 앞으로 갓! 눈매 사나운 훈련담당 하사관이 앞으로 갓! 하고 난 후 몇 초도 안 돼서 뒤로 돌아 갓! 하는 통에 얼이 쑥 빠져 나팔꽃이 앞으로 가다가 얼른 뒤로 돌아간다 나도 얼이 빠진다 나팔꽃뿐만 아니라 살구꽃도 건방진 장미도 평생 한 번 본 적도 없는 야생화도 보일 듯 말듯한 북두칠성의 여섯 .. 詩 2008.09.20
|詩| 낮에 노는 강 강이 재잘대는 강물이 낮 동안 실컷 놀다가 물고기와 더불어 까불며 놀다가 밤이 되면 말도 안 하고 웃음도 그치고 이중인격자 안색으로 슬금슬금 일을 하는 거야 일이라는 게 가만이 보면 바다로 바다 쪽으로만 흘러가는 짓 훌륭한 작업이에요 그런데 강물은 그 짓을 밤에만 한대나 봐 낙엽은 또 보라는 듯이 낮에만 떨어지잖아 밤에는 끈적한 수액을 몸 속에 똘똘 다진 다음 남은 힘으로 까칠한 가지를 끌어안고 자고 애써 자고 환한 햇살의 위로를 받아들이며 다음 날쯤 휘청휘청 떨어지고요 낙엽이 말이에요 누런 낙엽 한 잎 강물에 술렁술렁 떠내려 가네 그림 같은 낙엽 한 잎 얇은 그림자 낙엽 한 잎이 강물이 재잘재잘 떠들면서 낮 동안 실컷 노는 사이에 © 서 량 2008.09.18 詩 2008.09.18
|詩| 밤에 흐르는 강 밤에 강이 흐르는 광경이 무시무시해요 많이많이 무서워 왜 그런지 알 수 없어요 밤에 흐르는 암갈색 강물은 밝은 대낮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조잘대는 참새처럼 경쾌한 강물과는 아주 달라요 밤에 흐르는 음산한 강물은 육중하고 둔하기 짝이 없는 한갓 동물에 지나지 않아 정말이야 한.. 詩 2008.09.17
|詩| 가을 파도 소름 돋는 여름이나 재채기 컹컹 터지는 가을 새벽에도 검푸른 바다가 파도가 거센 파도가 형체가 뵈지 않는 물기둥이 연신 울부짖는 걸 나는 외면하기로 한다 해저 깊숙이 숨어 있어 평생 한 번쯤 내 발바닥에 덜컥 밟힐 만한 희디 흰 연체동물을 소금물 흐르는 눈을 치뜨고 나는 울며불.. 詩 2008.09.16
|詩| 9월에는 그림자가 9월에는 휘영청 달빛 아래 우리들 그림자가 갈바람에 몸을 푸는 갈대인양 길쭉해집니다 9월에는 가녀린 풀꽃도 잠시 우쭐하는 단풍나무 가지도 내가 이름을 몰라도 좋은 그녀의 목도 길쭉해집니다 하릴없이 낙엽 옆자리를 더듬대는 갈바람의 손길은 아주 노골적으로 길쭉해요 9월에는 .. 詩 2008.09.10
|詩| 낙엽과 비행기 천길 만길 발 밑 지구 깊은 내부에 듬직한 막대자석이 버티고 누워 힘껏 잡아끄는 중력에 나는 쏠린다 대한항공기가 태평양을 횡단하는 한밤에 촘촘한 해상도로 컴퓨터 모니터의 파도는 듬직한 막대자석과 맞붙어 치고 박고 싸운다 물결 세차게 출렁이는 지구 위에 내 어릴 적 비행기과.. 詩 2008.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