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비단실 물결 거미줄이 혹한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어요 이것은 차마 차마 정말이지 추위가 몰고 오는 건드릴 수 없는 천상의 외로움이거나 뻔뻔스런 기쁨이랍니다 가늘고 끈적한 그러나 아주 힘찬 거미줄의 생존, 그 삶의 사명감이 주는 공허는 어떡해야 하나요 © 서 량 2009.01.23 詩 2009.01.23
|詩| 진눈깨비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 새하얀 눈과 우중중한 비가 앞을 다퉈 경쟁을 벌리는 장면. 뒷덜미에 갈기가 성성한 사자 두 마리가 서로를 힘껏 물어뜯는 순간순간이 무서워 죽겠어. 아주아주. 산지사방 음흉한 쥐색 뿐이에요. 벌거벗은 나무들이 섹시한 다리를 하늘 쪽으로 거미줄처럼 연.. 詩 2009.01.04
|詩| 기축년을 위한 두 개의 신년시 고개를 힘차게 들고 --- 서울대미주동창회보 1월호 표지시 겨울이 막바지를 지나고 관악구 신림동은 총명하고 부드러운 능선이다 종로구 연건동에도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진리 말고 친구여 이보다 무엇이 더 밝겠는가 동짓달 기나긴 밤 홀연히 사라지고 눈부신 기축년이 왔는데 서울이 부스스 .. 詩 2009.01.02
|詩| 몸풀기 꽁꽁 얼어붙어 수정 빛으로 번득이는 고드름 끄트머리부터 끊어지거나 뜨겁게 녹아 떨어지거나 온순한 격정으로 아무런 상처 없이 전신이 떨리는 추위, 추위에 턱까지 떨리네 이빨이 따각따각 부딪히는 초저녁 눈발이 휘날리네 희끗희끗, 미쳤어 정말, 이리와, 가까이 와서 몸을 풀어 봐.. 詩 2008.12.24
|詩| 숨쉬기 혹은 박자 맞추기 우주 변두리가 들쑥날쑥 톱니바퀴 모양으로 생겼어요 코스모스 꽃잎 여덟 개 울퉁불퉁한 모습 진분홍 꽃잎 요염한 가상자리 숨을 들어 마시고 내쉬는 사이에 드르륵드르륵 드럼 소리 들려요 챙챙 쿵 오픈 심발이며 대북 소리가 퍽퍽 터지네요 당신의 박자관념은 병적으로 산뜻해 이름 없는 나뭇잎이 .. 詩 2008.12.18
|詩| 지구의 미련 먹구름 사이를 뚫고 가녀린 눈썹 달이 눈웃음을 치며 지구를 당기고 있다네 달도 지구도 밤낮으로 서로를 힘껏 끌어당기고 있다네 헐벗은 겨울나무 땅 속에 깊이 잔뿌리를 내리는 막무가내 고집이라네 지구 핵심에서 뜨거운 화염을 뿜으며 조잡한 흙덩이가 나무의 올곧은 목숨을 기어이.. 詩 2008.12.15
|詩| 겨울 음악 하늘이 우중중한 회색 빛으로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겨울 아침에 베토벤 열정 소나타 3악장을 듣는다 국도 87번이 뉴욕 남북으로 줄기차게 뻗은 하이웨이가 나를 관통한다 겨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내가 열 살을 갓 넘어 앞마당 장독대 새파란 하늘 반들반들 비치던 간장 항아리 그 칠흑 같은 굴절의 삐딱한 각도가 하여튼 지금도 좋아라 가녀린 민들레 꽃줄기 여고생 당신 야들야들한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칠까 말까 고추장 고드름 아프게 뾰족하게 맴맴 내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뉴욕 하늘 완벽한 회색 빛 이게 내 유년기 하왕십리 지나 행당동 겨울이라면 눈비 질금질금 쏟아지다가 돌 축대 쿵 무너져 내리던 행당동 언덕길이라면 여기가 ©서 량 2003.02.03 - 2008.11.09 詩 2008.12.10
|詩| 별들의 혼성합창 별들의 혼성합창을 들어 본 적이 있니 정교하고 우람한 천체의 소리를 늦가을 겨우 남은 체온이 지구 의식 밖 어느 곳에 깊이깊이 숨어서 저렇게 커다란 합창을 하는데 화음진행이 엄청나게 오묘하지 않니 당신이 천체에 대한 우아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천체의 거대한 전율이 몸에 와 닿는 가.. 詩 2008.11.19
|詩| 가을 보내기 봄도 겨울도 다 괜찮지만 당신은 가을만은 믿지 마세요 골 깊은 땅이 썩을 듯 말듯 젖은 낙엽으로 덮이고 우중중한 산 그림자며 황급히 도망가는 철새며 조석으로 변덕을 일삼는 가을만은 믿지 마세요 둥근 땅과 하늘의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수록 당신의 뾰족한 영혼은 더 초롱초롱해 질 거에요 가을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가을은 단지 타고난 소임을 다 할 뿐 보아라 거칠고 조잡한 풀잎을 우적우적 뜯어 먹는 저 허기진 사슴의 무리를 쪽빛 하늘을 잡고 늘어지는 달 덩어리보다 더 고집이 센 천근만근 무거운 구름 떼의 행로를 믿을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당신의 애착심을 © 서 량 2008.11.12 詩 2008.11.12
|詩| 만보(慢步) 가을이 속보로 행진하고 있어요 바람결에 휙휙 정신 없이 뛰어가네요 나는 가을의 도망질에 반항을 해야겠어요 내 거역감은 만보(慢步)하는 데서 힘있게 솟아납니다 나는 세상에 있는 시간이라는 시간은 다 내것처럼 여유작작하게 가을을 휘적휘적 뒤쫓아가렵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 詩 2008.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