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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겨울 음악

하늘이 우중중한 회색 빛으로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겨울 아침에 베토벤 열정 소나타 3악장을 듣는다 국도 87번이 뉴욕 남북으로 줄기차게 뻗은 하이웨이가 나를 관통한다 겨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내가 열 살을 갓 넘어 앞마당 장독대 새파란 하늘 반들반들 비치던 간장 항아리 그 칠흑 같은 굴절의 삐딱한 각도가 하여튼 지금도 좋아라 가녀린 민들레 꽃줄기 여고생 당신 야들야들한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칠까 말까 고추장 고드름 아프게 뾰족하게 맴맴 내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뉴욕 하늘 완벽한 회색 빛 이게 내 유년기 하왕십리 지나 행당동 겨울이라면 눈비 질금질금 쏟아지다가 돌 축대 쿵 무너져 내리던 행당동 언덕길이라면 여기가 ©서 량 2003.02.03 - 2008.11.09

2008.12.10

|詩| 가을 보내기

봄도 겨울도 다 괜찮지만 당신은 가을만은 믿지 마세요 골 깊은 땅이 썩을 듯 말듯 젖은 낙엽으로 덮이고 우중중한 산 그림자며 황급히 도망가는 철새며 조석으로 변덕을 일삼는 가을만은 믿지 마세요 둥근 땅과 하늘의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수록 당신의 뾰족한 영혼은 더 초롱초롱해 질 거에요 가을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가을은 단지 타고난 소임을 다 할 뿐 보아라 거칠고 조잡한 풀잎을 우적우적 뜯어 먹는 저 허기진 사슴의 무리를 쪽빛 하늘을 잡고 늘어지는 달 덩어리보다 더 고집이 센 천근만근 무거운 구름 떼의 행로를 믿을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당신의 애착심을 © 서 량 2008.11.12

2008.11.12

|詩| 첩첩 산중

꿈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 속에서 또 꿈을 꾸다가 꿈들이 겹겹이 가냘픈 장미 꽃잎처럼 서로를 첩첩이 에워싸고 제각각 소망을 내세우며 새벽 이슬 차가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다니 당신 심성이 장미라고야 함부로 말 못하지 차분한 생각도 덤벙대는 욕망도 하나씩 속에 하나씩들 더 있고 그 바닥으로 당신이 미처 눈치 못 채는 사유와 소망이 도처에 흩어져 속속들이 숨어 있다니 꿈의 그림자를 일일이 다 분석하려고 파고들자니 끝도 없고 정신도 없어진다더니 정말 정말이라니 © 서 량 2008.10.09

2008.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