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양말, 사라지다

서 량 2022. 1. 20. 20:59

 

 

보물섬을 찾아 헤맨다 18세기 중엽 키다리 외다리 롱 존 실버가 모니터 화면에서 감쪽같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데 그가 어느 날 아래층 금성 세탁기에서 불쑥 홀로그램으로 솟아오를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파란 영국 해군 제복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모자를 쓴 채 아무 데나 무단출입을 하는 그가 어깨에 앵무새 날개를 펄럭이면서

 

닥터 리브시, Dr. Livesey*가 갑판에서 선장을 쿨하게 꾸짖는다 지금껏 아무 탈 없이 운행되는 아래층 금성 세탁기가 막말 잘 하기로 소문난 양말 한 짝을 꼬드겼다는데 때로는 짝이 다른 양말들이 한꺼번에 아담한 목선을 타고 야반도주로 떠난다는 거예요 거세게 출렁이는,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아! 글쎄, 희한한 금궤가 숨어있는 보물섬을 찾아서

 

* Long John Silver, Jim Hawkins, Smollett 선장 등과 함께 보물섬을 찾아간 의사. 일행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

 

 

시작노트:

세탁기가 바쁘게 돌아갈 때 가끔 그 속에서 파도가 친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물섬을 찾아가는, 무수한 돛이 덕지덕지 펄럭이는 야심찬 중세의 배를 생각한다. 늘 한쪽 어깨에 앵무새를 얹은 채 목발을 덜컥이며 거리낌없이 보행하는 롱 존 실버의 날카로운 눈빛을 상상한다. 양말 한 짝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 서 량 2019.1.6 -- 20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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