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량 358

|컬럼| 453. 아하와 어허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모음(母音) 탓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다 ‘에미 소리’ 탓이다. “아, 그리운 고향!” 하며 탄식한다. “어, 그리운 고향!”이라 하지 않는다. 나도 너도 ‘아버지, 어머니’ 한다. ‘어버지, 아머니’ 하지 않지. ‘아’는 밝고 남성미 흐르는 적극적 어감이지만 ‘어’는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풍긴다. ‘나’, ‘너’는 ‘아’와 ‘어’ 직전에 콧소리(鼻音) ‘니은’이 들어간 순수 우리말. 나는 당당한 주관이고 너는 약간 어두운 내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너는 날뛰며 나서는 나를 다스리는 고충을 감수하는 내 어머니의 직책을 맡는다. ‘aha!’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강하..

|詩| 방

방 -- 마티스 그림 “흰 드레스의 여자”에게 (1941) 하늘, 녹색 하늘빛 구름이 넘치는 방 개다리의자, 샛노란 의자가 붕 뜨는 방 땅은 싱싱한 겨자, 겨자색 흰 드레스의 10분의 1도 안되는 여자 얼굴 목부터 머리끝까지 아무것도 없다 싶지, 그치 詩作 노트: 마티스가 쓰는 노랑이 겨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 부드러운 선도 그렇다. 의자가 식빵처럼 보이기도 하고. © 서량 2023.10.28

|詩| 의성어

의성어 -- 마티스 그림 “만돌린을 든 여자”에게 (1921 – 1922) 야자수 두 그루 손에 잡힌 만돌린 창문에 그림자 여자 뒷모습 재잘대는 잔파도 初聲 中聲 終聲 표주박 표음문자 쓰읍 씁 쓰읍 씁 Chick-a-boom chick-a-boom Ba-dum-bum-CHING 바덤범 칭 詩作 노트: 우리말 의성어는 ‘쿵따닥!’ 하면서 뒤가 탁, 끊기지만 영어 의성어 ‘치커붐!’은 울림이 큰 終聲이다. 재밌지? © 서 량 2023.10.26

|詩| 벌레잡이제비꽃

벌레잡이제비꽃 인터넷 속 거무튀튀한 돌 틈에 뿌리를 박고 우두커니 서 있는 벌레잡이제비꽃 바람이 구름의 품을 파고든다 활짝 펼쳐지는 핑크 빛 요술 일렁이는 전자파장 벌레잡이제비꽃이 눈물을 흘린다 초록 바람 전자파장 속에 찌르르 감전되는 나 詩作 노트: 24년 전 詩, ‘인터넷에 잡힌 꽃’을 많이 고친다. 24년 동안 나는 좀 달라졌고 語法도 달라졌다. © 서 량 2009.04.14, 2023.10.23 수정

2023.10.23

|詩| 겹치마

겹치마 -- 마티스 그림 “붉은 소파”의 여자에게 (1921) sofa bed 시트는 빨강, 빨간색 백색 부츠를 신은 채 다리를 꼰 채 겹겹으로 쌓이는 feelings, feelings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하는 생각도 생각이다 pale blue 옅은 청색을 에워싸는 빨강이다 詩作 노트: 누워서 생각을 할 때는 모로 누워 하는 게 좋다. 똑바로 누워서 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채롭다. © 서 량 2023.10.18

|컬럼| 452. 베이컨을 좋아하세요?

‘배다’를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➀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 냄새가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아 있다. ➁배 속에 아이나 새끼를 가지다, 물고기 따위의 배 속에 알이 들다. ➂물건 사이가 비좁거나 촘촘하다, 생각이나 안목이 매우 좁다. ➃배우다 (비표준어) 한자어로 ➀을 습관 ➁를 임신 ➂을 치밀 ➃를 학습으로 명사화 해서 생각하면 얼른 이해가 간다. ‘배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원학적으로, ‘배우다’가 ‘배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라. 배운다는 것이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인생경험, 철학적 명제의 깊은 이해처럼 시일과 반추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래서 인간은 긴 세월을 학교를 다니고 임산부..

|詩| 포즈

포즈 -- 마티스 그림 “황토색 안락의자의 푸른 옷” 여자에게 (1937) 보라색 꽃 둥둥 떠도는 실내 액자 속에서 방을 내려다보는 여자 navy blue 꽃병 손잡이 navy blue 옷을 다 입은 여자 黃土色 안락의자 등받이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黃土色 머리 가다듬고 포즈를 한 번 더 취하는 詩作 노트: 꿈속에서 꾸는 꾸는 꿈처럼 액자 속에 그려진 액자를 본다. 주인공 여자는 포즈를 취한 자세. 액자 속 여자는 웃고 있다. © 서 량 2023.10.16

|詩| 화장대

화장대 -- 마티스 그림 “화장대에서 책 읽는 여자”에게 (1919) 2 bottles of perfume 빛깔이 다른 향기, 향기 회색 거울 속, 흑백 영화에 나오는 여자 4분의 3박자 짙은 음악, 음악 前景 두텁게 젖혀진 curtain 背景 투명한 silk curtain, 반쯤 열려있다 무릎 위에 펼쳐진 책 또한 詩作 노트: 이 여자는 테이블이 아니라 화장대 앞에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말고 간간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점검하는지. © 서 량 2023.10.13

|詩| 밀착취재

밀착취재 -- 마티스 그림 “푸른 배경에 앉아있는 누드” 여자에게 (1936) 살色 뱀, 뱀이다 낮게 흐르는 천체, 짙은 청색 계단 큰 별 작은 별이 아파하며 뒤척이는 천체 녹색 깻잎 타원형 깻잎 영문을 몰라 하는 괄호 속, 속 깊은 살色 뱀, 뱀이다 詩作 노트: 마티스 그림 속 여자를 밀착취재 한다 속을 콕콕 찌르는 언급과 질문을 한다 © 서 량 2023.10.08

|詩| 군의관 배지

군의관 배지 -- 마티스 그림 “보라색 하모니” 여자에게 (1923) 분홍에 가까운 violet 누렁에 가까운 크레용 색 손톱을 짧게 깎은 손 여럿이 벽을 만진다 갈색, 褐色 여자 머리 위로 펼쳐지는 선인장, 仙人掌 빛 군의관 badge 보인다 비둘기 날개 詩作 노트: 마티스의 여자 머리 위로 펼쳐지는 듯한 비둘기 날개 착시현상에 연이어 눈에 뵈는 듯한 군의관 시절 배지 © 서 량 202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