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량 358

|詩| 산뜻한 절망

산뜻한 절망 아찔한 색채감으로 말하고 싶었다 낙엽이 땅에게 덤벼드는 모습을 희희낙락 보여주고 싶었지 소멸은 광활한 기쁨 물안개 피어나는 몸부림 오른쪽 발을 철썩 내딛는 희열 흩어지는 물방울 모습 잎새의 슬로우 모션 자포자기는 참으로 화사한 색채감이에요 詩作 노트: 14년 전 말투를 뜯어고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겉모양을 바꿨더니 속 내용도 달라진 느낌인데. 글쎄다. © 서 량 2009.04.07 – 2023.11.24

2023.11.24

|詩| 가을 냄새

가을은 갓 끓인 누룽지, 널브러진 이부자리, 가을은 비 내리는 한밤중 당신 심층심리다. 속 깊은 바닷물결에 전후좌우로 몸을 흔드는 미역줄기, 주홍색 햇살 넘실대는 하왕십리 행당동 지나 뚝섬 길섶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도마뱀의 신중한 동작, 가을은 내 몸 냄새다. 씹지 않아도 저절로 씹어지는 군용건빵의 텁텁함, 새벽 4시에 창문을 열면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왕창 쏟아지는 분홍색 초록색, 가을은 빛살 가득한 당신이 얼마 후 부드러워지는 기운이다. © 서 량 2022.09.05 - 2023.11.21 詩作 노트: 고전적 취향에 젖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을은 언어습관에 지나지 않을 뿐. 향기라는 단어선택이 잘 맞지 않는 가을이 나를 지나친다.

2023.11.21

|詩| 안락의자

안락의자 -- 마티스 그림 “까만 옷을 입은 노란 안락의자의 젊은 소녀”에게 (1935) 오른쪽 위쪽 연분홍, 연분홍 하늘 아래로 퍼지는 빛, 빛 뭉치 올리브 색 잎새 아래로 넘치는 midnight 블루 노란 의자에 누워서 꼼짝달싹하지 않는 여자 왼쪽 팔을 길게, 길게 옆으로 뻗은 채 詩作 노트: 마티스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 흥미진진하게 자유롭고, 조용하고, 혼자였다.”라고 말한다. 내가 시를 쓸 때도 그렇다. © 서 량 2023.11.20

|컬럼| 454. 바람떡

옛날에 정신치료에 심취한 적이 있다. 남들을 대할 때 손에 땀이 나서 악수하기를 꺼리는 핸섬하고 스마트한 40대 중반 독신 로버트의 형은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 놈’이다. 누이 셋은 왕년에 잘 나가던 시스터 보컬 그룹. 주야장천 형제자매 이야기만 하는 로버트. 로버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필, feel’이 잡히지 않는다.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에 있어서 삶은 끊임없는 ‘가십, gossip’의 연속일 뿐 저 자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로버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주체(主體)의 부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지배하는 주어(主語)의 부재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자아(自我)의 부재현상. 단군의 후손들 핏속에 흐르는 피해의식, 남의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불안감 때문에 문장에 주어가..

|詩| 붉은 거북이

붉은 거북이 -- 마티스 그림 “붉은 실내, 푸른 테이블 위의 정물” 속 여자에게 (1947) 머리는 위쪽 양팔을 앞쪽으로 꽃병에 꽂힌 여린 식물 실내에 둥실 뜬 보름달 달 속 여자가 슬며시 웃는다 빨간 벽 푸른 테이블 언저리로 지직, 지지직 갈라지는 거북이 등짝 詩作 노트: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따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서 야수파(野獸派)라 불리는 마티스에게 거북이 한 마리를 선사한다. © 서 량 2023.11.08

|詩| 소파

소파 -- 마티스 그림 “소파 위의 젊은 여자”에게 (1944) Window 창문 없는 곳 大腦 brain 다 부질 없다 새까만 hair 번듯한 양팔 양다리 든든한 몸통 노랑 빨강 검정으로 수직 수평으로 휙휙 금이 그어지는 실내 젊은 여자 詩作 노트: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는 1941년에 받은 小腸癌 수술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cut-outs,”(색종이 오리기) 등등 작품활동을 하다가 1954년 11월 3일에 죽는다. © 서 량 2023.11.03

|詩| 시선

시선 -- 마티스 그림 “에트루리아 화분과 함께 한 실내”의 여자에게 (1940) 숲에서 산다 가을에도, 火山巖 화산암으로 만든 커다란 화분, vase 손잡이 서넛 밑으로 손바닥 여럿 테이블 위 노란색 주홍색 과일을 바라보며 숲에서 산다 여자는 詩作 노트: 실내에 항아리만한 화분이 있고 숲이 우거지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과일들이 맛있어 보인다. © 서 량 202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