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모음(母音) 탓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다 ‘에미 소리’ 탓이다.
“아, 그리운 고향!” 하며 탄식한다. “어, 그리운 고향!”이라 하지 않는다. 나도 너도 ‘아버지, 어머니’ 한다. ‘어버지, 아머니’ 하지 않지. ‘아’는 밝고 남성미 흐르는 적극적 어감이지만 ‘어’는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풍긴다.
‘나’, ‘너’는 ‘아’와 ‘어’ 직전에 콧소리(鼻音) ‘니은’이 들어간 순수 우리말. 나는 당당한 주관이고 너는 약간 어두운 내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너는 날뛰며 나서는 나를 다스리는 고충을 감수하는 내 어머니의 직책을 맡는다.
‘aha!’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강하게 깨달었을 때 튀어나오는 영어 표현. 반면에, ‘uh-huh’는 상대를 수긍하는 소극적 의사표시다. ‘aha’는 목이 확 트인 소리지만, ‘uh-huh’는 성대(聲帶)가 좀 닫힌 채 나오는, 별로 내키지 않는 울림이다. 네이버 사전은 우리말 ‘어허’를 ‘조금 못마땅하거나 불안할 때 내는 소리’라 풀이한다.
금요일 오후 그룹테러피 세션. 정상과 비정상은 어떻게 다르냐? “정상이 아닌 것을 비정상이라 합니다.” 이것이 정상이다, 하는 규정은 누가 내리느냐? “의사가 내립니다.” 아니다. 의사가 아니라 의사가 속해 있는 사회가 내린다. 사회란 무엇이냐? 사회는, 에헴,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현시대의 대다수가 내리는 의견의 총체적인 결론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정의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정상과 비정상의 세부목록은 결코 의사나 신(神)이 미리 작성해 놓은 게 아니라니까.
12명 중 서너 명이 한꺼번에 “Aha!” 한다. 기대하지 못했던 반응. 나는 속으로 “어렵쇼!” 한다. ‘아’가 아닌 ‘어’로 터지는 간투사. 내 핏줄에 흐르는 순수 우리말, 어렵쇼. 나는 뾰족한 것에 찔렸을 때 “Ouch! 아우치!” 하지 않고 “아야!” 하는 편파적 이중언어자(二重言語者)다.
한글 이중모음(二重母音)에는 야, 여, 요, 예, 얘, 왜 등등 자그마치 11개가 있다 한다. 영어 발음으로 ‘y’ 소리, 또는 ‘이’ 발음이 섞여진 이중모음. ‘야~, 여보세요, 얘가 왜 이래~’에서처럼 어떤 정감을 풍기는 ‘y’ 소리. ‘yes!’ 할 때의 바로 그 ‘이’에 힘이 들어가는 소리!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출석을 부를 때 꼭 이름 끝에 ‘이’를 붙여서 부르셨다. ‘김창남’ 대신 ‘김창남이’, ‘서량’ 대신 ‘서량이’ 하실 때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한오수’ 대신 ‘한오수이’ 하셨는데 문법적으로 틀렸지만 마냥 푸근하게 들렸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Charles’ 대신 ‘Charlie’, ‘Bill’ 대신 ‘Billy’, ‘Nick’도 ‘Nicky’라 부르는 사실을 지적한다. 애칭이다. ‘mommy’, ‘daddy’ 다 친근감이 넘친다. 그러나 아무도 ‘Jesus, 지저스’를 ‘Jesusy, 지저시’라 부르지 않아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농담을 해서 미안하다고 얼른 덧붙인다.
이 조심스러운 우스개 소리에 몇몇이 “하하하” 하며 웃는다. 병동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크게 외친다. “Ah, yes! 아, 그렇지,” “Yes, indeedy-doody! 암, 그렇고 말고!” ‘indeedy-doody’는 ‘indeedy’의 희언(戲言)이다.
© 서 량 2023.10.29
뉴욕 중앙일보 2023년 11월 1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10/31/society/opinion/202310312107502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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