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33

가을 문(門) / 김종란

가을 문(門) 김종란 문은 열리며 닫힌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 건조한 열기에 뒤틀리어 덜거덕거린다 문 턱에 걸려 넘어진다 숲을 이루던 푸르른 미소 낮은 곳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다 숨겼던 눈물 떨어지는 곳 구부리고 신발 끈을 다시 맨다 노란 잎 뒹굴듯 뒹굴듯이 일어서다 순간 빛나며 쌓여 있다 호흡하며 일어선다 적막(寂寞)에 귀 기울인다 신라 시대에도 네가 그랬듯이 강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불어 가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몸을 가볍게 말려 노랗게 흩어지며 목이 긴 새와 함께 나른다 © 김종란 2013.09.18

두번 째 가을 / 김정기

두번 째 가을 김정기 손바닥 실금에서 피가 흘러요 그 줄기가 가을꽃으로 피어 따뜻하게 집안을 덮어도 안개가 안개를 몰아내는 길 돌아가는 길은 멀고 아득해요 죽지 않는 나무들이 몰려와 둑을 막아도 가을은 벌써 봇물로 쏟아져 들어와서 무릎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두 손에 받든 하루의 무게를 공손하게 맑고 아름다웠던 당신에게 드려요. 손바닥 굵은 금에서 강이 흘러요 이 강은 소리 없는 곳으로 흘러가 가을 억새밭에 당도한대요. 천만가지 빛깔이 어우러진 보기만 하여도 기절할 것 같은 이 가을날이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눈에 보여요. © 김정기 2010.11.02

가을 책 / 김종란

가을 책 김종란 아직은 다 읽지 못한 책, 가을 다시 받아 들고 손끝으로 지난 지문들을 더듬어 익히며 옛 향기 흠, 흠 들이마셔 가슴에 품어보고 마음의 어둑한 서고에 가지런히 꽂아 보기도 하고 미쳐 넘겨보지 못한 채 멈춘 그 페이지 그 生生한 우울에서 시작해 크고 검은 눈망울이 뚜렷한 엉클어진 짧은 머리 큼직한 배낭을 매고 소매엔 약간 때가 묻은 분홍빛 손 꿈꾸는 너 다시 만나 불 붙어도 향기로운 가을 나무 곁을 익숙한 발자국으로 머무르던 곳 서성이던 곳을 지나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는 오래된 책 석양의 시간은 멈춰진 듯 느리고 붉다 이야기의 끝을 향해 더욱 선명하게 가을은 변주된다 웅크린 어둠은 저 곳에 머물게 하고 오래된 이야기 책 빛으로 지금 지나는 우리에겐 처음인 이야기 이 아까운 이야기에 ..

잎새의 가을 / 김정기

잎새의 가을 김정기 지금 떨고 있다 햇살에 꽂히려고 몸을 비틀면 더욱 눈부시게 떨리는 침엽수 뾰족한 잎. 한 세상 부딪치며 잡던 손, 한번 다시 스치기만 하고 놓아 줄 것도 없는 키 큰 나무가 무서워 허공을 뛰어내리는 잎새의 곡 소리 안개도 문을 닫고 아는 기척도 없다. 분배된 땅에는 이름 짓지 않은 하늘이 여전히 푸르다. 빛나는 지난 날은 휘어서 삭아가고 떠나는 옷자락 부여잡고 엉킨 실 풀어놓으려 하니 어느 거대한 바람이 번져서 물결이 되어 후두둑 지난 날 빗방울도 데려오는 기나긴 잠이 든다. 숨겨두었던 날카로운 눈초리 한번 써먹지도 못하고 들켜버린 잎새의 가을. 조용하다, 적막조차 떨린다. © 김정기 2009.09.25

|詩| 따스한 가을

바람 부는 오후에 간들간들 떨어지는 잎새에서 비릿한 향내 피어난다 이거는 중세기 시절 몸집 하나 우람한 흑기사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송충이 속눈썹에 코가 알맞게 큰 귀부인의 아득한 몸 냄새라고 우기면 고만이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거 말고 아무런 딴짓을 못하는 저 갈색 잎새들은 지들 몸에서 무슨 향내가 나건 말건 도무지 알지 못하지 하늘 청명한 시각에 어둠이 한정없이 깔린 땅으로 나 몰라라 하며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지면 고만이다 곧장 © 서 량 2022.10.8 시작 노트: 가을이면 꽃도 꽃이지만 잎새에 눈길이 자주 쏠린다. 가을은 내 청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중세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말이 시각(視覺)으로 돌변한다. 가을이면 몸의 오감(五感)이 달아오를 뿐, 내가 굳이 가을을 탄다는 말은 ..

2022.10.08

|詩| 魚眼렌즈

가을이 내 곁에 머문다 하늘색 도화지에 그리는 생선이 물 위로 솟구친다 사방으로 튕겨지는 무지개 색 속 깊은 바닥으로 몰려드는 물방울 양 옆을 잘 살피는 물고기 눈이 부드럽기도 하지 가을은 물속이야 그건 싱싱한 생선 향기 묻어나는 볼록 렌즈일 거예요 가파른 숨소리를 포착하는 수정체 180º 각도로 물 위를 점검하는 魚眼이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가을이라니 © 서 량 2020.09.17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