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가을 책 / 김종란

서 량 2022. 12. 5. 18:57

 

가을 책

 

                           김종란

 

아직은 다 읽지 못한 책, 가을

다시 받아 들고 손끝으로 지난 지문들을

더듬어 익히며 옛 향기 흠, 흠 들이마셔

가슴에 품어보고 마음의 어둑한 서고에

가지런히 꽂아 보기도 하고

미쳐 넘겨보지 못한 채 멈춘 그 페이지

그 生生한 우울에서 시작해

크고 검은 눈망울이 뚜렷한 엉클어진 짧은 머리

큼직한 배낭을 매고 소매엔 약간 때가 묻은 분홍빛 손

꿈꾸는 너 다시 만나 불 붙어도 향기로운 가을 나무 곁을

익숙한 발자국으로 머무르던 곳 서성이던 곳을 지나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넘기는 오래된 책

 

석양의 시간은 멈춰진 듯 느리고 붉다

이야기의 끝을 향해 더욱 선명하게 가을은

변주된다

웅크린 어둠은 저 곳에 머물게 하고

오래된 이야기 책

빛으로 지금 지나는 우리에겐 처음인 이야기

이 아까운 이야기에 몰두한다

페이지가 지워지며 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갈 때까지 

 

© 김종란 200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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