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147

|詩| 혀끝

겨울바람에 뺨이 빨갛게 익은 채 안경 쓴 여자가 눈을 깜박인다 책갈피에 찡겨 있는 꽃이 뜨거워지자 금방 불이 난다 책이 그 자리에서 몽땅 다 타버렸다 혀끝을 아랫니 윗니 사이에 넣고 꽉 깨문다 그렇게 아프게 혀를 깨물면 자각심 경각심 튼튼한 경계심으로 내 인생을 채찍질하는 생각들이 판을 친다 판을 치면서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한다 나는 큰 명분도 없이 가슴을 쾅쾅 두드린다 800 파운드짜리 털북숭이 눈 흰자위가 왈칵 뒤집히도록 골이 난 고릴라처럼 벌떡 일어서서 © 서 량 2005.02.05-- 2007년 3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오래된 책갈피 속 마른 꽃이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몰래 간직한 겨울이다. 어느 날 불꽃이 고릴라로 돌변한다. 이윽고 책에 불이 붙는다. 18년 전, 바람 부는 겨울 들판을..

발표된 詩 2023.03.01

|詩| 겨울 소리

헐벗은 공기 알맹이 지직 지직 하는 초음파 주파수 내가 못 알아 듣는 딴 나라 말 鬼神이 내는 목쉰 소리 머나 먼 갤럭시 세찬 숨소리 등등 왠지 푹 갈아 앉는 기분이에요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겨울 냄새가 코 끝에 아찔해 헐벗은 공기 알맹이가 나를 실눈으로 흘겨보는 순간 터무니없는 *default 設定 이거 으응 응 흠 흠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미 설정돼 있는 작업 환경 © 서 량 2022.12.17 https://news.koreadaily.com/2023/02/10/life/artculture/20230210172330609.html [글마당] 거울 소리 헐벗은 공기 알맹이 지직지직 하는 초음파 주파수 내가 못 알아듣는 딴 나라말 鬼神이 내는 목쉰 소리 머나먼 갤럭시 세찬 숨소리 등등 왠지 푹 가라앉..

발표된 詩 2023.02.12

|詩| 겨울 아침

어제를 잊듯 커튼을 열어 제친다 함박눈 속 깊이 더러운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이 켜켜이 파묻혀 있구나 몸이 거무죽죽한 어미 사슴이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꼬리를 사르르 떤다 어미가 연신 고갯짓을 하니까 새끼들이 눈을 얼굴에 문지르며 세수를 하는 거 있지 한 놈이 머리를 들어 내 방 안을 들여다본다 바람결 시린 귀를 뒤로 제치고 부르르 떤다 그놈이 더럽게 살아있는 내 마음을 차근차근 뜯어보다가 한참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 눈 덮인 언덕 쪽으로 갑자기 겅중겅중 뛰어가는 거 있지 시작 노트: 눈 내린 아침에 사슴을 마주하리라는 예측을 전혀 못했지. 사슴과 나는 서로가 살아있다는 걸 기쁘게 확인한다. 에미 사슴도 새끼 사슴도 꼬리를 사르르 떨거나 몸을 부르르 떨더라. 고갯짓도 하고 겅중겅중 뛰기도 하던데. 나..

발표된 詩 2023.01.02

|詩| 가을 음악

할로윈데이, 당신 의향과 관계없이 음산한 음악 소리 들린다 좀 있다가 쩌렁쩌렁 울리는 트럼펫 듀엣 멜로디 싱그러운 밤의 숲속, 숲이 일그러지는 순간 오랜만이야, 하며 서로를 얼싸안으면 급히 터지는 재즈식 화음, 격한 불협화음 혹은 당신과 내가 한통속이라는 느낌,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 주며 프렌치 호른이 감싸주는 화음 처리 아주 높은 음역에서 내는 공명음이라면 한참 더 좋지 눈을 꾹 감고 묵상하는 위로, 그런 든든한 위로감이라면, 가끔씩 또는 시작 노트: 10월 중순경부터 사람들은 음산한 가을에 대항하기 위하여 해골과 귀신을 기꺼이 바라본다. 나도 그렇다. 무서운 것들이 우리를 긴장시키면서 좀 재미가 나지만 여간하지 않고서야 우리는 아무도 함부로 크게 웃지 않는다. 금관 4중주, 두개의 트럼펫과 트럼본,..

발표된 詩 2022.11.02

|詩| 낯선 사람들

어깨를 하늘로 향하는 동작 또 다른 한편 이상하다 아기 공룡 S자 모양 목 선이 참 친숙해요 당신 말이 다 맞다고 단정 내리는 순간이지 황혼 녘 아기 공룡에게 말을 붙이는 순간 내 속 낯선 사람 여럿이 뛰쳐나와 군대 식으로 뻣뻣이 서있는 모습 2중 언어 대뇌피질에 맺히는 이슬 방울 무슨 말을 해도 절대 통하지 않지 나는 내게 한참 낯선 사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쿵 쓰러지는 아기 공룡 또 다른 한편 아무렇지 않다 무슨 말을 해도 괜찮지 그치 이제는 시작 노트: 자폐증 환자를 면담하다가 친밀한 감정이 솟는다. 내가 그의 속 마음을 전혀 몰라도 괜찮다는 생각에 휩쓸린다. 부모, 형제, 나 자신도 서로에게 다 낯선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이 터진다. 비스마르크 왈, 소시지와 법에 대한 존경심을..

발표된 詩 2022.08.16

|詩| 도시의 6월

어느새 실비가 내리고 있었지 실비가 금세 장대비로 변했다 뻔뻔스런 장대비가 꿈 속, 눈을 뜰 수 조차 없이 들이부어 쏟아졌지 염치없이 당신 영혼이 중앙청 앞에 lower Manhattan 선창가에 즐비했지 가로수가 즐비했어 깜짝 놀라게 햇살이 난무하는 도시의 거리 화사한 초록색 환상, 눈이 벌게지는 빵, 빵, 하는 캐딜락과 현대차의 경적 뽀얀 티끌, 티끌 입자들이 자유여신상과 춤을 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배경음악이 순 칼리포니아 식 쿨 재즈였어 시작 노트: 아까 부터 장대비가 쏟아져 내린다. 나는 집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듯하고 장대비가 내 정수리를 후드득 후드득 때린다. 문득 서울 중앙청 앞이 생각나고 자유여신상이 생각나고 lower Manhattan 선창가가 떠오른다. 초록의 가로수가 빌딩에 몸을 ..

발표된 詩 2022.06.19

|詩| 두 개의 색소폰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

악기편성이 소프라노색소폰 테너색소폰 피아노 베이스기타 드럼으로 5인조 주제 멜로디는 푸른 하늘 은하수 단순하게 하늘이 칙칙하게 좀 어둡게 보이게 소프라노가 리드한다 테너와 베이스는 오로지 조용한 화음 넣기 절대로 미리부터 흥분하지 않는 피아노 주제의 끝 부분에서 드럼이 치지지익! 치를 떤다 스윙 리듬의 민망스러운 낌새 곧 악기들은 개성이 사라진다 춤 출 때 남녀 몸매 차이가 사라지듯 흐치! 흐치! 흐치! 흐치! 규칙적인 장단 배후에 애절한 피아노 코드 시시각각 확고하게 언성을 높이는 드럼 이윽고 피아노 블루스 스케일이 띠리리링! 깔리고 나서 테너가 한발 앞으로 나선다 대뜸 처음부터 높은 음정을 취하는 테너 체면이 땅에 쿡 떨어져도 괜찮다는데야 당신도 어쩔 수 없지 음산하게 낮은 소리를 내는 소프라노 소프..

발표된 詩 2022.06.07

|詩| 꿈, 생시, 혹은 손가락

쟤는 지금 자고 있어요 하는 어머니 목소리 들린다 나는 자고 있구나 어머니도 지금쯤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려나 기타와 바이올린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어 하나는 작고 하나는 좀 큰가, 그게 다야? 기타인지 바이올린인지 음정을 규정하는 당신 왼쪽 가운데 손가락 끝이 떨린다 실물 크기 천연색 손가락이야 당신 손가락 네 개가 미친 듯 한가을 메뚜기 떼처럼 인간성 없는 컴퓨터 칩처럼 지직 지지직 바삐 움직이고 있네 나른하고도 약간 서글픈 장면이라 해야 좋을지 몰라요 © 서 량 2007.11.17

발표된 詩 2022.05.20

|詩| 피아노 치는 여자*에게

피아노는 늘 육체를 다스리는 풍습에 젖는다 열 손가락으로 광! 광! 두들기는 말초신경의 뻔뻔함으로 육체를 거부하는 생리를 잘 알고 있는 피아노 치는 여자는 검정 속옷과 스타킹 어지러운 손가락 놀림 발밑에 눌리는 소프트 페달만으로 피아노는 충분히 남자의 함정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 목 아래로 푹 파여 있는 아늑한 함정이다 육체는 육체끼리 영혼은 영혼끼리 따로 떨어진 연습실에서 음계연습을 한다 머리를 잘 빗지 않는 남자를 자신에게 단단하게 묶어 두기 위하여 오늘도 밤늦도록 피아노 치는 여자여 이룰 수 없는 사랑, 저 싱싱한 페미니즘이 붉은 피를 흘릴 때 슬며시 고개를 드는 휴머니즘을 위하여 나를 때려 다오, 피아노 치는 여자여 여지 없이 나를 발로 짓눌러 다오 새까만 그랜드 피아노 소프트 페달처럼 * 피아노 ..

발표된 詩 202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