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147

|詩| 간장에 비친 얼굴

날 맑은 가을날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항아리에 얼굴을 집어넣으면 새까만 간장거울 속에 눈 흰자위가 분명치 않은 커다란 얼굴 열 살 짜리 얼굴 내 얼굴이 아닌 얼굴이 보인다 얼른 머리를 빼고 다시 보면 매운 고추와 숯 덩어리 몇 개 무작정 둥둥 떠 있는 간장항아리 속 간장거울 뒤쪽으로 은박지 하늘이 흔들린다 내 얼굴도 세모 네모 마름모꼴 사다리꼴로 일그러진다 크레용으로 북북 그린 그림 유년기 도화지 속 도깨비 얼굴 골이 잔뜩 난 도깨비 이마에 뿔이 크게 두 개 솟아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간장항아리 안에서 끈질기게 파도가 친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파도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끝이 안쪽으로 하얗게 말리는 어떤 파도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 서 량 2004.10.23 2005년 4월호에 게재 ..

발표된 詩 2022.03.20

|詩| 지독한 에코

뚜껑을 덜거덕 열고 장독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푹 박고 들여다보면 내 사랑을 둥그렇게 구획하는 경계 안의 컴컴한 내막이 아우성치는 무시무시한 에코가 얼굴을 때린다 정신이 얼얼해지고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금방 지나간 듯 귀가 멍멍해지는 에코! 지구가 암흑 속에서 꿈틀대는 격렬한 동작 값싼 교훈 같은 거를 들먹이는 고대소설의 권선징악 마음 착한 남녀가 막판까지 살아 남는 사연 그리고 또 있다 시인들은 너 나 다 아름답다는 망상 등등 하여튼 간에 빈 항아리 속에서 아! 하는 지독한 에코 때문에 지성이고 쥐뿔이고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늑한 이기심이 솟는다 아무 것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항아리에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가 © 서 량 2005.12.28 2006년 12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발표된 詩 2022.03.19

|詩| 꽃에 관한 최근 소식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이 꽃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안 꽃 내장이 뭉그러지고 꽃 뼈가 으깨지고 꽃은 무색 무취의 기체가 된다 꽃은 항상 이름 없는 동작이다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을 알려 할 때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려 할 때 꽃의 근엄한 칭호가 당신을 방해한다 우리는 묵묵한 꽃말 골갱이를 씹어 삼키고 너덜너덜한 말(言) 껍데기를 뱉어낸다 꽃말을 먹을 때마다 꽃이 되는 우리들 꽃보다 더 새빨간 몸짓으로 으스스 진저리를 치는 우리들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 서 량 2004.03.04 2004년 5월호에 게재 『시문학』2004년 6월호에서 (페이지 177-182) 이달의 문제작: 중에서 -- 안수환 (시인) 의미의 해체. 시적 진실의 존재론적인 자기파괴. 시는 ‘의미’가 아닌 ‘사건’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발표된 詩 2022.03.11

|詩| 표범무늬 블레이크

저 플라스틱 연장통은 새 시대를 위한 詩的 장치 폭발직전의 페미니즘이야 연장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십자 스크루드라이버를 능숙하게 조이면서 블레이크가 詩語를 바꾸고 있어요 플라스틱은 반 정도만 투명해, 끝내 블레이크는 동양철학 설파에 실패한다 호랑이 꼬리가 시계 방향으로 꽉 비틀어 조이는 그림의 詩想은 무언가 *Tyger Ty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부처가 엄지와 검지로 그리는 ‘ㅁ’ 공간 위쪽 삐딱한 허공을 지적하는 표범무늬 저 세 번째 손가락은 무언가, 無言歌 속에 물음을 묻고 나를 쿨쿨 잠재우는 당신은 무언가 *신비주의자, 선지자로 불리는 영국 시인 William Blake (1757~1827)의 대표작 “The Tyger”의 첫 두 ..

발표된 詩 2022.01.15

|詩| 새벽 비

나뭇잎들이 강변에 누운 채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어 몸을 뒤척이며 입술 웃음을 띄우네 머리가 젖는다 나무에 비가 내리네 바람이 불고 있어 10월 하순, 보폭이 넓어진다 푸르른 강물은 빗물의 다정한 tour guide 푸르른 강물은 빗물의 유유한 여행길 하늘 빛이 붉은 회색으로 변신하는 시간이네 먼 벌판에서 늑대들 울부짖는 소리 새벽, 이른 새벽에 스며들어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데 © 서 량 2021.10.24 https://news.koreadaily.com/2021/11/19/society/opinion/20211119172005288.html?detailWord= [글마당] 새벽 비 news.koreadaily.com

발표된 詩 2021.10.25

|詩| 하늘로 뜨는 유람선

기차가 힘차게 지나간 후 솜구름 눈부신 빛 언저리 잠든 듯 꿈 꾸는 듯 유람선 한 척 떠 있다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네 가벼운 물결만 촐싹거려요 나는 유람선, 느긋하게 전후좌우로 기우뚱거리고 있어 지금 맨해튼 하늘 빙판에서 몸매 뚜렷한 스케이트 선수 여럿 무자비한 속도로 질주한다 여기는 아테네 광장 여기에 왜 *tunic을 알몸에 걸친 당신과 나 아득한 숲의 기계체조를 관람하나 여기는 타임스 스퀘어 광장 기엄둥실 승천하는 **Ferris wheel 파도가 흰 이빨을 보이며 내 쪽으로 달려든다 *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입던 헐렁한 옷 ** 대회전 관람차 © 서 량 2021.09.15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746565 http://www.kore..

발표된 詩 2021.10.06

|詩| 뱀 무늬 수박

버그적 단칼로 몸이 와스스 쪼개지면서 살가운 체액을 하늘로 뿜어내는 풋풋한 힘 저 수박 속 숨은 힘을 보세요 생명은 무지합니다 연거푸 겉 다르고 속 다른 수작을 부리는 푸른 풀섶 뱀 무늬 수박을 더듬어 보세요 단호한 칼질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하고 무지의 비린내 풀풀 풍기는 수박을 어루만지다시피 당신은 지금 울고 있구나 칼이 무서워 너무나 무섭다면서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다지도 © 서 량 2010.08.28 - 2021.08.11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670008 미주중앙일보 – 미주 최대 한인 뉴스 미디어 www.koreadaily.com

발표된 詩 2021.08.29

|詩| 새벽 냄새

새벽에서 꽃 냄새가 난다 이상한 꽃 냄새 오후쯤에야 겨우 사라질까 말까 하는 뭇 별 냄새 내 쪽으로 오고 싶어 안달하는 은하수 냄새 얼추 회색인가 싶었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 대뇌피질을 연신 건드리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산뜻한 빛의 율동 오래 전 음력설에 맡았던 영락없는 당신 색동저고리 냄새 © 서 량 2006.08.10 - 2021.08.16 (수정) 원본 -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8.16

|詩| 색소폰 솔로

미리 준비한 것이 아무 쓸모 없어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저 음부에서 눈을 감는 수법으로 한동안 멈추는 숨길 나와라 썩 나와라 발바닥부터 눈썹 위까지 하나뿐인 영혼을 뭉개버리는 뻔뻔함으로 땀방울도 질펀하게 울어라 얼마든지 울어라 녹아내리는 금덩어리 손가락의 흉계 찢어진 나뭇가지 가파른 낭떠러지 흙 꽃잎 소금 지렁이 샛노란 하늘 시커먼 돌멩이 씩씩한 군인이 구름 속에 넘어졌다가 한참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난다 흐느끼는 것도 바람일 뿐이다 강물이 덩달아 울지 않는다 최고 음역에서 눈을 감는 수법으로 흙바람이 되돌아오는 기압골 소용돌이가 높은음자리표에 천천히 멎는다 무수한 소립자 십자 광선들이 금빛 색소폰 몸체 밖으로 이탈한다 시작 노트: 옛날에 쓴 시는 대개 몇 군데 고치고 싶기 마련인데. 25년 전에 ..

발표된 詩 2021.06.20

|詩|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

속이 훤히 들여다뵈는 노래 장단도 척처쿵 맞춰 주며 미리 다음 소절 첫 박자를 예고해 주는 그런 반주 전혀 없이 당신이 부르는 노래 음악이 옷을 다 벗어 던지고 까르르 지르는 비명 수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후드득 날아가는 순간 키보드 화음이 울려와요 협화음의 사나운 몸 떨림이에요 예리한 음정 깊숙이 스며드는 공명 멀리 들리는 당신 웃음 소리 in G major 알레그로로 번지는 악구(樂句)*에서 간간 간교한 장식음이 튀어나와요 *곡의 주제가 비교적 완성되는 두 소절에서 네 소절 정도까지의 구분 © 서 량 2005.08.28 - 2021.05.31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439048 [글마당]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 속이 훤히 들여다뵈는 노래장단..

발표된 詩 2021.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