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맑은 가을날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항아리에 얼굴을 집어넣으면 새까만 간장거울 속에 눈 흰자위가 분명치 않은 커다란 얼굴 열 살 짜리 얼굴 내 얼굴이 아닌 얼굴이 보인다 얼른 머리를 빼고 다시 보면 매운 고추와 숯 덩어리 몇 개 무작정 둥둥 떠 있는 간장항아리 속 간장거울 뒤쪽으로 은박지 하늘이 흔들린다 내 얼굴도 세모 네모 마름모꼴 사다리꼴로 일그러진다 크레용으로 북북 그린 그림 유년기 도화지 속 도깨비 얼굴 골이 잔뜩 난 도깨비 이마에 뿔이 크게 두 개 솟아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간장항아리 안에서 끈질기게 파도가 친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파도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끝이 안쪽으로 하얗게 말리는 어떤 파도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 서 량 2004.10.23 2005년 4월호에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