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147

|詩| 왕만두와 한국 동창회 소식

어젯밤부터 지금껏 비가 내린다 가랑비 같기도 이슬비 같기도 한 가을비 베어 마운틴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안개 속에서 나는 배가 출출하다 뉴저지 한미 슈퍼마켓에서 산 왕만두를 마이크로 오븐에서 2분동안 덥히는 중 어제 못한 메일 체크를 오늘에야 한다 한국 동창회 소식 뉴스레터가 왔구나 솔직히 말해서 왕만두 속에 들어있는 눅진눅진한 김치는 맛대가리가 없다 왕만두 밀가루 배를 외과 수술칼로 쭉 짼 다음 새빨간 고춧가루 김치 냉장고 햇김치를 속에 쑤셔 넣어 먹는다 냠냠 이제야 김치 왕만두 맛이 제대로 나는구나 내 6년 대학 후배들이 한국 뇌종양 학회장이며 간질학회 차기회장에 선출됐다는 기사를 읽는다 내 동기동창 박찬일이가 대한 암학회 이사장으로 선임됐구나 옛날 청량리 예과 시절 바람 부는 당구장 근처를 우울한 귀..

발표된 詩 2021.06.11

|詩| 여우비 내리는 날

여우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가 경마장 함성처럼 질주하면서 내 차를 스치면서 험준한 계곡을 빠지면서 여우비가 쏟아지는 거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크웨이를 달리는 용모 어슷비슷한 승용차들이 제각각 무슨 굉장한 철학서적을 읽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요 앞차가 깜박이를 키네 나도 깜박이를 켰지 분명한 이유가 없었어 여우와 호랑이는 그렇게 비 내리는 날 시집 장가를 갔다 청명한 날이면 날마다 그냥 누워 잠만 쿨쿨 자는 종족보존 본능이라니 여우비를 맞으며 나는 슬며시 사라지고 얼굴이 대충 당신을 닮은 내 종족이 살아 남으리라는 생각이 솟았다 불쑥 © 서 량 2007.03.03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6.08

|詩| 조명 관계

삼각형의 각도가 문제였어 검정 옷을 걸친 정통파 유대교의 지저분한 수염 속에 깊숙이 숨어있는 모세의 비밀, 빛이 추는 춤사위, 깡마른 손가락이 긁어내는 곡선 따위가 관심사였어 삼각형 뿐만 아니었지 진흙 속에 사족(四足)을 튼튼히 박아 놓은 직사각형도 골치 아팠다 행실이 방정한 직사각형도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나도 덩달아 상체가 기우뚱한다 세상에 수직이나 수평은 없어 사랑도 구원도 없다 우리는 욕심이 없어요 둘 다 고해상도로 선명한 조명을 원할 뿐 다만, 빛의 각도에 따라 당신과 내가 천 개 만 개로 분산되는 불씨이기를 삽시간에 사라지는 망실이기를 © 서 량 2010.06.27 -- 네 번째 시집 에서

발표된 詩 2021.05.12

|詩| 간접조명

이등변 삼각형은 늘 편안해 보여요 빛이 꼭 그렇게 창문 밖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원자도 광자도 중성자도 얼른 보면 환하다 뿐이지 억 배 정도 확대하면 어둡단 말이야 아주 어두워 나무 몇 그루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부동자세로 서있네요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빌딩 숲도 황혼을 축복하는 마지막 오렌지 빛인데 검정색 새떼가 빛의 배경을 사납게 긁으면서 시끄럽게 날아갑니다 당신 입술 잔주름이 빌딩 그림자들과 묘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다 저는 지금 경쾌한 행진곡을 듣고 있는 중이랍니다 속 눈썹이 긴 커다란 눈동자의 여자가 안개 낀 새벽녘 가로등 앞 튼튼한 사다리꼴 벤치에 이불도 덮지 않고 달랑 누워 하늘을 바라봅니다 다리라도 좀 움직이지 않으려나 아무도 없네요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 서 량 2011..

발표된 詩 2021.05.11

|詩| 어두운 조명

색깔을 원했던 거다 입에 절로 침이 고이는 과일 그림도 좋고 열대 섬에만 서식하는 화사한 꽃 무리의 난동이라도 괜찮아 정물화가 동영상으로 변하고 있네 무작위로 흔들리는 미세한 바람이며 부동자세로 숨을 몰아 쉬는 새들이 어슴푸레 아울리고 있어요 흔적으로 남을 우리 누구도 서둘러 떠나지 않을 거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가물 빛을 흡입하는 색깔의 아우성을 듣는다 시퍼런 탐조등이 밤을 절단하는 어둠의 틈서리에서 우리는 몸을 뒤척인다. © 서 량 2012.01.25 --- 네 번째 시집 에서

발표된 詩 2021.05.09

|詩| 손목시계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당신을 지나친다 약속을 지키듯 내 손목을 잡아 끄는 당신의 음모를 깊고 그윽한 당신의 속셈을 가냘픈 아주 빨갛게 가냘픈 당신의 초침 하나만 빼놓고 전 산천초목이 흘러간다 나도 덩달아 흘러간다 나는 당신의 뼈저린 사연을 알아내고야 만다 당신의 꿈이 내 손목에 구름처럼 걸쳐있다 분명하게 아주 분명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당신을 지나친다 나는 이 순간에 당신의 실체를 묵살한다 울면서 기쁘게 울면서 속으로만 © 서 량 1996.10.17 -- 시문학(詩文學) 1997년 10월호에 게재

발표된 詩 2021.04.17

|詩| 서서 꾸는 꿈

시간이 비틀어져요 내 중뇌(中腦) 깊숙이 붙박이로 자리잡은 시간관념이 배배 꼬이네 은행나무 나이테 동심원 동그라미들 뺨이 움푹움푹 파여요 진한 핑크 빛 뒷동산이 쑥쑥 자라 옛날 옛적 KBS 방송국 근처 남산 송신탑보다 훨씬 높게 하늘을 찌릅니다 어마어마해요 산길 오솔길 위에 맹목의 발자국들이 차곡차곡 쌓이는구나 한동안 단전호흡을 하다가 슬며시 눈을 뜨면 남산이 콩알만해 진다 당신의 알뜰한 피부감각이 스르르 흩어지면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내 환상의 변두리를 훌훌 넘나드는 흰옷 입은 신선들의 긴 은발만 자꾸 눈에 밟혀요 © 서 량 2011.06.24 (시와 시세계) 2016

발표된 詩 2021.04.03

|詩| 꿈에 대한 보충설명

정신병은 건재한다 낮에 뜬 반달이 내게 눈길을 보내는 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돼 우리의 영혼이 안전한 길목에 접어든 증거입니다 앞이 안 보이는 마음에 들떠서 마구 들떠 허둥지둥 하늘 밖으로 쏟아지는 별무리를 잡으려 하더니 한사코 아주 평온한 기분이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해 정신병의 갑옷이 당신의 영혼을 보호한다 든든해 아주 든든해요 반달이 내게 미소를 보내기 전, 멀리서 아주 멀리 작은 새 여럿이 떼를 지어 날아갑니다 효험 있는 약을 외면한 채 이토록 생생한 꿈의 막바지 끈을 놓지 못하는 우리들 때문에 © 서 량 2018.06.17 -- 2019년 겨울호

발표된 詩 2021.04.01

|詩| 사고현장

미안합니다 몇 개의 상징을 품고 오셨다가 단 하나의 상징만을 남기고 떠나셨음을 제가 압니다 그렇게 애쓰지 않으셨어도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애쓰지 않으셨어도 괜찮았을 것을 상징의 의미를 아무리 건드려 보아도 상징은 다시 살아나지 않음을 뒤늦게 전해 드립니다 상징은 상징끼리만 오래 내통해 왔음을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자신도 하나의 상징만으로 남을 것임을 속 깊이 알고 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서 량 2000.11.16 (문학사상사, 2001)

발표된 詩 2021.03.27

|詩| 싫어도 봄이라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지 육중한 얼음장 바닥에서 아앗! 뜨거워라, 뺨이며 광대뼈며 삼각형으로 다림질 당한 단풍잎들이야 죽건 말건 정이월 춘삼월 내내 진눈깨비 끼리끼리 순 지들 맘대로 난동을 부렸다는 식이지 동네 수양버들 능수버들 갓난애기 젖비린내 냄새 난다 딩,동! 하는 섬세한 손가락이며 겁난다 언덕길을 스치는 미끈한 엉덩이 싫다, 싫다! 외면해도 한번 더 붙자는 식이지 느지막이 도착해서 내 앞에 서는 봄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봄 © 서 량 1999.03.26 (문학사상사, 2001)에서 수정 - 2021.03.17

발표된 詩 2021.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