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에 뺨이 빨갛게 익은 채
안경 쓴 여자가 눈을 깜박인다
책갈피에 찡겨 있는
꽃이 뜨거워지자 금방 불이 난다
책이 그 자리에서 몽땅 다 타버렸다
혀끝을 아랫니 윗니 사이에 넣고 꽉 깨문다 그렇게 아프게 혀를 깨물면 자각심 경각심 튼튼한 경계심으로 내 인생을 채찍질하는 생각들이 판을 친다 판을 치면서 뺨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한다 나는 큰 명분도 없이 가슴을 쾅쾅 두드린다 800 파운드짜리 털북숭이 눈 흰자위가 왈칵 뒤집히도록 골이 난 고릴라처럼 벌떡 일어서서
© 서 량 2005.02.05-- <현대시학> 2007년 3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오래된 책갈피 속 마른 꽃이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몰래 간직한 겨울이다. 어느 날 불꽃이 고릴라로 돌변한다. 이윽고 책에 불이 붙는다. 18년 전, 바람 부는 겨울 들판을 관통하는 의식의 흐름이 딱 그런 식이었다. - 2023.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