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147

|詩| 기차를 위한 감별진단

기차는 폐활량이 열라 크면서 여간 하지 않고서야 몸뚱어리가 뜨거워지는 법이 없대요 철로가 밑에서 받혀주는 균형감각도 대단하잖아 기차는 땡볕과 빗물에 시달리면서도 절대 넋두리를 하지 않는 독종이라지 기차의 특이체질은 유전에서 왔다 합니다 기차는 부끄러움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는대요 사태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 언성만 높여요 기차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세차게 달리는 기차를 밖에서 볼 때와 멋진 신사복 차림새로 기차 안에서 휙휙 지나치는 창밖을 내다볼 때를 잘 분별해서 묘사해야 된다는 말이겠지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론지 떠나고 싶어요 © 서 량 2012.05.31-- 월간시집 2012년 12월호에 게재

발표된 詩 2021.03.04

|詩| 트럼펫의 논리

트럼펫 피스톤 세 개가 달가닥거린다 기차 바퀴에 철제 스프링이 수평으로 밀린다 트럼펫 마우스피스에 비밥(bebop) 재즈주자의 입술 세포가 묻어 있다 기차가 배~엑 기적을 울린다 기차가 달리는 소리 칙칙폭폭 하는 리듬이 태아의 심장박동과 일치한다고 당신은 바락바락 우긴다 치기직청청 치기직청청 트럼펫 멜로디를 뒷받침하는 드럼 리듬이 단조롭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기차가 끼~익 브레이크를 밟자 꼬리가 둘씩 달린 32분 음표들이 공중으로 푸드득 툭툭 활개를 치며 도망간다 트럼펫 피스톤 세 개가 동시에 밑으로 내려오고 세 손가락에 얼이 쑥 빠지면서 당신의 시론(詩論)이 왕창 무너진다 © 서 량 2006.10.12 -- 2007년 3월호에 게재

발표된 詩 2021.03.01

|詩| 뜨거운 생선

나이 먹으면 먹을 수록 인격이 원만해지기는커녕 좋고 싫음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틈만 생기면 저를 놀리려 하시네요. 우리는 늘 과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새삼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짓 몇 개를 빼 놓고는 다른 일일랑 입 싹 씻고 눈도 주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을 다져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접시 위에 얌전하게 놓인 생선이 저는 평생 단 한 번도 피를 흘려본 적이 없다고 속삭인다. 과거를 피하지 마세요. 과거는 마음의 고향이랍니다. 비단결 망사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날렵하게 기어오르던 물결, 그 광범위한 물살에 씻기고 씻겨 삐죽삐죽 돋아난 가시가 당신의 혀를 찌르는 저녁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부드러운 생선살에 레몬즙을 뿌린다. © 서 량 20..

발표된 詩 2021.02.18

|詩| 밤에 피는 꽃

세상 모든 꽃들이 기억으로 남는 절차가 떠오른다. 꽃이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악착같이 독존하는 붙박이 코닥컬러 사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꽃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들의 노예인 우리가 잡고 늘어지는 현존의 복사체.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며 당신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꽃의 복사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실존이 아니야. 미안하다. 실존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난다. 소중한 순간순간들, 부질없는 역사를 소리 없이 기록하는 꽃이 내 전부일 것이다. 꽃은 추억의 블랙 홀 속으로 완전히 흡인돼 버렸어. 저 아프도록 아슬아슬한 장면장면들. 밤에 피는 꽃은 생각지도 않던 어린 시절 불알친구와 꿈에 나누는 대화다. 반세기 전쯤에 야, 이놈아! 하던 친구 모습이 떠오르네. 밤에 피는 꽃은 한 순간 찌르르 당신 코 밑으로 부서지는 ..

발표된 詩 2021.02.17

|詩| 겨울 냄새

아까부터 겨울이 부스럭거려요 벌거숭이 팔을 흔들며 창밖에서 떡갈나무들이 부르는 합창을 듣고 있어요 그러다가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중간에 나오는 트럼펫 솔로가 따따따 울립니다 지금 진눈깨비가 어깨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잖아요 신바람나는 개다리춤, 내가 좋아하는 개다리춤, 그러다가 살려주세요, 하는 애원으로 이어집니다 아까부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은빛, 신선한 은빛 기류(氣流)를 맞이하고 있어요 나 지금 © 서 량 2021.01.02 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071542 [글마당] 겨울 냄새 아까부터 겨울이 부스럭거려요벌거숭이 팔을 흔들며 창밖에서떡갈나무들이 부르는 합창을 듣고 있어요그러다가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중간에 나오는 트럼펫 솔로가따따따 울립니다지금..

발표된 詩 2021.01.02

|詩| 어항 주인

꼬리가 길게 늘어진 금붕어를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마치도 곱게 펼쳐놓은 조그만 장난감 부채를 보는 기분이 든다 이 조그만 장난감 부채는 맑은 물속에서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킨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금붕어를 키우기 위하여 고생을 해 왔고 마음 속 전쟁을 벌려 온 것이다 어항 주인이 다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금붕어들 중에도 제일 생명력이 강한 금붕어는 노리끼리한 주홍색의 몸 빛깔에 흡사 시골 개천에서 흔히 잡을 수 있는 민물붕어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금붕어다 생김새가 총알 처럼 보이는 이 강인한 족속은 6.25 때 청량리 역전 쯤에서 우리들 발길에 아무렇게나 채이던 어린애 손가락 정도 크기의 M1 총알과 허물어진 시멘트 벽 기총사격의 상처와 恨을 연상 시키는 데가 있다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전..

발표된 詩 2020.09.13

|詩| 떡갈나무의 오후 4시

누가 하루의 극치가 정오에 있다고 했나요, 누가 오후 네 시쯤 개구리 헤엄치 듯 춤추는 햇살의 체취를 얼핏 비켜가야 한다 했나요 봄바람은 이제 매끈한 꼬리를 감추고 없고, 초여름 뭉게구름이 함박꽃 웃음으로 지상의 당신을 내려다 볼 때쯤 누가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품에서 밀어내고 싶다 했나요 반짝이는 떡갈나무 잎새들 건너 쪽 저토록 명암이 뚜렷한 쪽빛 하늘 속으로 절대로 철버덕 몸을 던지지 않겠다고 누가 말했나요 © 서 량 2009.05.29

발표된 詩 2020.07.26

|詩| 봄이 나를 버리고

매년 봄이면 손짓하고 꼬리치고 싱그러운 들판을 함부로 뛰어다니며 봄을 유혹하다가 덜컥 변덕이 나서 내가 먼저 달콤한 작별을 고하기도 하는 줄로 예사로이 알았는데 // 매년 봄이면 나무들이 벌건 대낮에도 몸에 꼭 끼는 초록색 야회복을 입고 루비며 진주 목걸이를 달랑달랑 걸친 그 모습에 고만 질려서 내 뻥 뚫린 시야를 앞지르는 게 정말 미워서 눅진눅진한 앞마당 밖으로 내가 먼저 봄을 쫓아내는 줄로 참 예사로이 알았는데 // 이제 나 봄 정원 귀퉁이에 하나의 돌멩이가 되어 좀 긴장하며 눈 감은 채 가만가만 누워있고 봄이 지 마음대로 이상한 요술을 부리다가 불시에 나를 버리고 훌쩍 떠나겠다는 데야, 이제 나는 © 서 량 2006.05.25 [뉴욕 중앙일보 글마당] – 2020.02.16 개작

발표된 詩 2020.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