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있고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잔디밭 돌길.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서재를 지나 반들거리는 복도가 부엌에 이른다. 문은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칸막이를 상징한다. 문은 외부자극을 차단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피스 문을 닫은 채 직장이나 연구실에서 열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 추구하는 작업에 심취하여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지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은 남과 소통하고 싶은 기색을 도통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워크가 산더미로 쌓인 병원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중 전화가 온다. 오래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야, 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폐증상, autistic symptom’이 도지는 것 같다, 하며 농담을 내뱉는다.
현대인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낸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기다리며 마주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셀폰에 몰두하는 젊은 남녀를 무심코 지나친다. 앞에 앉아있는 애인보다 손에 움켜쥔 인터넷 상황에 정신이 팔린 남녀는 마치 말을 붙이면 큰일이라도 날것 같은 모종의 경계심을 품은 태도다. 이들은 상대를 향한 마음이 닫혀진 상태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1908년, 스위스 정신과의사 유진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는 ‘schizophrenia, 정신분열증’과 함께 ‘autism, 자폐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autism’을 ‘현실에서 분리된, 현실과 동떨어진 정신상태’라 설명한다.
현 미정신과협회 진단 매뉴얼에서는 자폐증이라는 독자적 병명 대신 ‘Autism Spectrum Disorder,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아리송한 명칭을 사용한다. ‘자폐증’이라는 질환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스펙트럼’만 있다는 이론이다.
남들과의 상호작용, 사회성 결핍, 또는 부적절한 언행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기가 힘드는 스펙트럼 장애인. 유별난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한정된 관심사가 비기능적일 뿐더러, 자신의 내적 상황에 대응하는 강도가 유난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들은 아주 큰 소동은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남들과 난처한 상황에 곧잘 빠지면서 분열증 환자와는 달리 정신병원 안팎에서 불편한 대인관계를 그렁저렁 지탱할 뿐이다.
‘autism’은 1912년부터 일반인들도 쓰기 시작한 일상어로서 ‘self, 자신’이라는 뜻의 고대 희랍어 ‘autos‘에서 유래했다. ‘automobile, 자동차’와 같은 어원임은 물론이다. ‘autonomic nervous system, 자율신경계’ 할 때의 그 ‘auto’. 독자적, 독립적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여진다.
20세 후반 나이 백인 남자 환자와 대화를 나눈다. - 너는 왜 병원 정원에서 다른 여러 환자들과 함께 바람을 쐬는 동안 직원 눈을 피하여 나무 위에 올라갔느냐? - 미국의 유럽을 향한 금융정책이 잘못됐습니다. - 그런 위험한 짓을 하면 안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하며 상대를 만족시키는 대답 대신 그는 묵묵부답이다. 소통의 차단 상태, 고집불통으로 일관하는 자폐증상, 독하게 이기적인 스탠스다.
자신이 하는 일, 주어진 사명,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기 위하여 번잡한 외부 자극을 차단하는 사람들 또한 독하게 이기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수도승들이 심심계곡에 숨어 참선을 하거나 도(道)를 닦았던 일도 같은 맥락이다. 살아있음에 몰두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는 우리 모두가 자폐 스펙트럼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서 량 2023.11.27
뉴욕 중앙일보 2023년 11월 2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11/28/society/opinion/202311281751518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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