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네들은 겸손하다. 남의 도움을 받고 싶은 본능적 몸가짐이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등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이 마치 무슨 용서라도 구하는 태도다. 노인네들은 공손하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고 싶다. 같은 말을 앉은 자리에서 되풀이 하거나 전에 했던 말을 하고 또 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뜸을 들이며 쉼표 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 그, 왜, 저’, 하는 간투사로 언어공간을 메꾸는 사이에 상대방이 몸을 꼰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을 회고하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어’,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신은 현재보다 과거가 좋았다는 속마음을 내비친다. 가난과 곤혹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웃기도 하고 ‘개고생’ 하던 군대생활을 떠올리고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그때는 좋고 지금은 나쁘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현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두뇌활동은 과학적 객관을 인지하는 능력과 더불어, 니체가 지적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성적 주관이 활개치는 기능을 겸비한다. 이 두 작용을 조종하는 지렛대가 기억(memory)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메모리는 쇠퇴하는 법. 심하게는 치매에 이르지만 경미한 경우에 “아, 내가 깜빡했네,” 하며 상대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미국인들은 이런 경우를 ‘senior moment’라 부른다.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가 오래되면 기능이 부실해지는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 ‘senior’는 13세기 라틴어로 ‘old, 늙었다’라는 뜻이었다가 15세기에 ‘고위급’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변했다. 1938년에 ‘senior citizen’이라는 듣기 좋은 표현이 처음 나왔다는 기록이다.
우리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달갑잖은 버릇은 스스로의 두뇌활동을 자극하는 습관일지도 몰라. 육체운동, 반복적으로 조깅을 하거나 헬스클럽에 가는 습관이 몸에 좋은 것처럼 두뇌운동, 했던 말을 또 하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습관이 두뇌건강에 좋다는 버젓한 이론일 수도 있어.
정적을 깨며 자기 생각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진짜 두뇌운동이다. 가만이 앉아서 상상으로 조깅을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소리없이 하는 생각 또한 말이 안되지. 말이 많는 노인네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두뇌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습관을 용허한다.
이들이 가진 것은 과거일 뿐이라는 극단적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옛날의 멋진 추억이 엊그제 5박 6일 크루즈 관광여행에서 성능 좋은 셀카 사진보다 훨씬 더 즐겁고 풍요롭다.
골수에 박힌 관습, 꼰대스러운 가치관, 등등,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며 고개를 떨구는 ‘과거애착증’은 외로운 중독현상이다. 현재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고 미래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워서 과거에만 연연하는 우리들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딱하다.
년말이 다가오는 세상이 소란스럽다. 시끌벅적한 2023년 12월 하순 맨해튼 거리. 종교적 축제라는 의미 외에 한 해가 저무는 아쉬움을 행동으로 발산시키는 집단심리다. 몇몇 노인네들이 젊은 행인들에게 떠밀리듯 걸어간다.
당신과 나는 알고 있다. 해가 바뀔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을. 두려움을 제어하며 외로움을 달래려고 많은 관광객들이 맨해튼에 엄청나게 모여든다. 구세군 벨을 딸랑거리며 모금자가 신명나게 춤을 춘다. 군중에 섞여 거리의 소음을 공유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외로움을 망각하는 것이다.
© 서 량 2023.12.24
뉴욕 중앙일보 2023년 12월 27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12/26/society/opinion/202312261740427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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