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y'는 전쟁에서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그 땅을 정복한다는 의미의 14세기 라틴어 'vincere'에서 왔다. 'win'도 승리한다는 말. 얼른 들으면 같은 뜻처럼 들리는 'victory'와 'win'은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어원에서 왔다. 전쟁에 승리했을 때는 'victory'라 하고 올림픽 경기에서 이겼을 때는 'win'이라 하지. 정복하기와 이기기는 그 뉘앙스가 다름을 당신은 부디 명심할지어다.
'win’은 고대영어로 'winnan'이었는데 본디 뜻은 '노력하다; 애쓰다; 일하다; 싸우다'였다. 경기나 시합에서 이긴다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62년경. 이긴다는 것은 애쓰고 노력하고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작업이다. 상대방의 실수를 학수고대하는 그런 야비한 경쟁심의 발로가 절대로 아니다.
고대영어의 뜻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breadwinner'라는 현대어가 있다. 집안의 벌이를 하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땀 흘리며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라는 말. 'breadwinner'는 '빵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빵을 이겨서 무엇 하나.
'lose'는 고대영어 'los'에서 왔는데 '깨지다; 망가지다; 잃다'라는 뜻이었다. 시합이나 내기에서 진다는 의미가 파생된 것은 1533년경. 여기에서 당신에게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밝힌다. 위에서 말했듯이 양키들에게 시합에서 이긴다는 뜻의 'win'은 19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그 빛을 보았는데, 진다는 개념의 'lose'는 아주 일찌감치 16세기에 생겨났다는 것. 저 낙천적인 양키들도 아프고 어두운 어휘가 먼저 탄생한 다음 근 3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긍정적인 단어가 출현했다는 사실.
한자의 '이길 승(勝)'에는 '힘 력(力)'자가 떡 들어가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세야 된다는 이론이다. 역(力)은 상형문자로서 팔에 힘을 줬을 때 툭 불거진 근육의 모양이라고 옥편은 해명한다. 이 상형문자는 또 농기구인 가래 모양이라고도 하는데 나중에는 '일하다'는 뜻으로도 변했다. 그래서 노력(努力)한다는 의미는 고대영어의 'win'과 그 뜻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기는 것은 곧 노력의 결과다.
'패할 패(敗)'는 어떤가. 이 형성문자의 오른쪽 절반 부분은 '회초리로 치다'는 뜻으로 막대기를 들고 치는 형상이다. 당신은 조개(貝: 패)를 막대기로 때려 볼지어다. 이때 조개는 산호, 호박, 수정 따위로 만든 값진 물건, 패물(貝物)을 뜻한다. 값비싼 물품을 막대기로 때리면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그런 식의 삶은 권장할 삶이 못 되는 법!
우리말의 '이기다'는 시합에서 상대를 꺾는다는 의미 말고도 감정이나 욕망 따위를 억누른다거나, 고통을 참고 견디거나, 밀가루나 흙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한다는 뜻도 있다. 감정이나 고난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에게 물을 부어 역경을 물렁물렁하게 반죽하는 것이다.
'지다'는 상대에게 꺾인다는 뜻. 그리고 당신이 '내가 졌다, 졌어!' 할 때처럼 상대방에게 양보한다는 의미도 있지. 해나 달이 서쪽으로 넘어간다는 뜻도,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도 '지다'라 한다. 지는 것은 늘 그렇게 서글프다.
요즘 북경에서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다. 엊그제 중국의 어느 기계체조 선수가 평행봉을 하다가 양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로 휘청거리는 막대기에 잠깐 주저앉는 장면을 보았다. 얼마나 긴장하고 힘이 들었으면 그랬을까. 이긴다는 게 무엇이길래.
그래도 이긴다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힘을 겨루어 승패를 가리고 상대를 앞서려고 우리는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던가. 자기 감정을 억누르기 위하여 우리는 또 얼마나 뜨거운 땀을 흘리고 몸과 마음에 찬물을 끼얹으며 자신을 짓이겨 왔었던가.
© 서 량 2008.08.17
--뉴욕중앙일보 2008년 8월 21일에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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