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5. 만족이 주는 슬픔

서 량 2007. 8. 25. 11:15

 만족이 주는 슬픔 ‘sad’는 ‘슬프다’는 말이다. 양키들은 이 말을 참 싫어 한다. 우리들이 슬픔을 찬양하는 것처럼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슬픔을 미화시키지 않는다.

 

 ‘sad’는 ‘만끽하다; 만족시키다’를 의미하는 ‘sate’와 그 어원이 같다. ‘sate’는 라틴어의 ‘satis’에서 유래했는데 ‘충분하다’는 뜻. 만족스럽다는 뜻의 ‘satisfy’는 ‘satis’의 끝에 ‘fy’만 붙인 말이다. 충분하면 만족스럽지만 만족은 슬픔의 서곡이다. 이 공식에 따르면 흥부전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놀부였다.

 

 예수의 생애 마지막 12시간을 기록한 2004년도 영화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Christ)에서도 로마병정이 예수를 고문할 때 ‘Satis!’ 라는 라틴어가 자주 나온다. 그때 영어자막은 ‘Enough!’(고만해!)였다.

 

 만족스럽다는 말과 슬프다는 말이 어원이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충분=만족’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옛날 서구의 의식구조에는 전혀 없었다고 보면 금방 이해가 간다. 고대의 서구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넉넉해지는 순간 싫증이 나고 슬퍼진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우리도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이민 와서 빈곤에 시달리며 뼈빠지게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기뻤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리가 잡히고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우리는 슬퍼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키들은 만족하면 게을러 지고 게을러 지면 슬퍼졌다. 서구식 기쁨의 밸런스는 은행 구좌처럼 많을수록 좋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날씬해 지면 기쁘고 살이 찌면 슬퍼하는 현대 여성의 체중 밸런스에 비유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요’ 하는 성경구절은 부자로서 천국에 가기는 다 글렀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천국은 만족의 종착역에서 포만감으로 씩씩대는 저 무기력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한국적인 슬픔은 그 말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슬프다’는 ‘섧다’ 혹은 ‘서럽다’라는 말에서 왔고, 그 말이 나중에 ‘설다’로 전환되었다. ‘설다’는 ‘모자라다’ ‘서투르다’라는 뜻. 덜 익은 밤은 ‘선 밤’ 모자라는 잠은 ‘선 잠’ 서투른 무당이 사람을 잡을 때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한다. 낯 설고 물 설은 이국 땅에서 늦은 저녁상이라도 대하면서 ‘밥이 설었어!’ 하고 소리쳤을 때 당신은 얼마나 서럽고 슬펐던가.

 

 이렇게 우리의 의식구조는 모자라고 미흡함을 슬퍼해 온 것이다. 배가 부르면 슬퍼했던 양키들에 반하여 우리는 배가 고프면 서러워 했다. 양키들은 잘 먹어서 진저리를 쳤고 우리는 못 먹어서 진저리를 쳤던 것이다.

 

 양키들의 공식 ‘충분=슬픔’과 우리의 공식 ‘미흡=슬픔’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서양의 과잉증세와 동양의 결핍증이 이렇게 처절한 대조를 이루면서 쌍방의 정서를 지배해 온 것이다. 배가 불러도 슬프고 배가 고파도 슬픈 우리의 난경을 어찌할 것인가. 놀부도 흥부도 둘 다 우울증에 시달릴 자질이 역력한 것이다. 과연 우리의 기쁨이란 충족하지도 않고 미흡하지도 않은 동안만 잠시 머물렀다 가는 저 바람 같은 순간들이란 말인가.

 

©서 량 2006.06.27

-- 뉴욕중앙일보 2006년 6월 28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