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04. 진실을 말하고, 도망쳐라!

서 량 2018. 1. 22. 11:54

27살 젊은 나이에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국방부장관에 해당되는 병조판서가 됐다가 그 이듬해에 역모 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을 생각한다그를 음해한 류자광(柳子光, 1439~1512)의 계략을 점검한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이조 초기를 살았지만 시쳇말로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는 금수저서자출신인 류자광은 흙수저 출신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류자광은 여러 왕을 섬기며 파란곡절의 벼슬살이를 하다가 말년에 귀양을 떠나 74살에 장님이 된 후 병사했다그는 조선왕조 역사에 출몰한 3대 간신 중 단연 첫 번째로 손꼽힌다.

 

남이의 시북정가(北征歌)를 생각한다. -- 백두산 바위에 칼을 갈아 다 닳게 하고 / 두만강 물을 말에게 먹여 다 없앤들 /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男兒二十未平國) / 후세에 누가 그를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류자광은 이 시 세 째 줄의 '평평할 평()'자를 '얻을 득()'자로 바꾸어 '男兒二十未得國'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획득하지 못하면)이라는 뜻으로 조작해서 왕에게 알린 후 역모 죄를 뒤집어씌워 남이를 죽게 했다.

 

조작된 진실도 진실인가사실(事實)과 현실(現實)과 진실(眞實)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당신과 내가 칩거하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허위인가.

 

당신은 사실현실진실모두가 '열매 실()'으로 끝나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자는 지붕 아래에 산적한 옛날 중국의 화폐 단위였던 조개()를 끈으로 꿴 모습이라고 옥편은 풀이한다사실도 현실도 진실도 어원학적으로 보면 재력과 권력에 매달리는 인간의 속물근성에서 피어난 이상한 꽃이다어쨌든 진실은 실세(實勢)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이 엄연한 진리다.

 

'truth'는 전인도유럽어의 굳세고 튼튼하다는 말에서 유래했다진실을 힘과 세력에 근거를 둔 서구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놀랍다우리는 진실과 진리의 차이를 분별하지만 truth’는 진실과 진리를 동일시하는 점 또한 재미있다

 

정신과에서 환자와 의사 둘 중 실권자는 누구인가터무니 없는 망상이 환자를 지배하는 진실이라면 그런 환자를 현실에 적응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어려움이 의사의 괴로움이다두 사람이 당면한 현실에 정신을 집중해야 상담을 위한 좋은 관계가 이뤄진다. 상담은 쇼가 아니다.

 

진실은 사랑처럼 주관적일 수 있지만 사실은 대개 딱딱한 객관적 재료의 나열이다우리를 쥐락펴락하는 언론은 그 잡다한 사실의 포장 속에 진실을 깊이 은닉하고 있다자타가 인정하는 보편적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오랜 세월과 진통을 겪는 사연이 안타깝기만 하다.

 

화가이자 시인이면서 신비주의자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말로 해서 이해가 되는 진실은 결코 있을 수도믿을 수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진실은 그만큼 알기 어렵다. 비평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 "모든 위대한 진실은 욕지거리로 시작된다."고 갈파한다유고슬라비아 속담에 듣는 사람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이른바 사이다 표현은 또 어떤가. -- '진실을 말하고도망쳐라!

 

550년 전 그때 남이 장군은 조선천하를 향하여 욕이라도 내뱉으며 진실을 말한 후 중국 같은 데로 야반도주하여 소중한 목숨을 건질 걸 그랬다말이 안 되는 말을 해서 당신에게 미안하다민간설화에 의하면 그는 해외도피는커녕 우리 무속신앙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주력(呪力)이 대단한 영혼으로 크게 소문이 났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잡귀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장군신이 되어 서울지역에 건재하고 있다 한다.    

 

 

© 서 량 2018.01.21

-- 뉴욕중앙일보 2018년 1월 24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