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였는지 가장 기초적인 기하학을 배우던 마당에서 삼각형, 사각형, 같은 품위 있는 한자어에 마름모꼴, 사다리꼴처럼 순수한 우리말을 처음 배웠던 기억이 난다.
'꼴'이라는 단어는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는 학설도 있다. '꼴'은 한자어 골(骨)이 경음화 된 발음이라 하니 그것은 마치도 '골통'이 '꼴통'으로 변천한 언어의 변천사와 진배없다.
상대하기 싫은 놈을 향하여 '저 놈은 꼴도 보기 싫다'라고 뇌까리는 우리의 말 습관은 또 어떤가. 당신의 언어감각이 잠든 사이에 '닮은꼴'에서처럼 중립적으로 쓰이는 '꼴'의 뜻이 어찌 그리 부정적으로 변했는가.
궁금하던 차에 사전을 찾아 봤더니 "꼴의 뜻이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혹은 어떤 형편
니아 처지 따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 우리말에는 사물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너무나많다. 얼굴을 뜻하는 말로 단순히 '낯'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낯짝'이라고 하는 심사는 무슨 놀부 심사인가?
'꼴 좋다' 하면, 한국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여차하면 칭찬하는 의미로 받아드리리라. '꼴불견'이라 하면 일견 엄숙한 한자말로 어떤 모습이 하도 흉해서 소위 눈뜨고 못 보겠다는 모욕적인 표현이다.
'폼난다' 할 때 쓰는 '폼'은 영어의 'form'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드려서 쓰게 된 일상용어다. 우리는 외래어를 꼭 지지고 볶아서 비빔밥처럼 혼용하는 묘한 버릇이 있다.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필(feel)이 꽂힌다'라 하고 폼생폼사(form生form死: 폼에 살고 폼에 죽기)가 그 좋은 본보기다.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같은 의미로 말을 할 때 왜 우리말로 '꼴 좋다' 하면 불쾌하게 들리면서 '폼난다'며 영어를 섞어 쓰면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말이다.
모습 혹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영어에는 'form'이나 'shape'가 있다. 그래서 잠시 'shape'라는 단어에 대하여 초점을 맞춰 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신만큼은 아무리 글쟁이라 하더라도 이때 절대로 '아이러니하게도'라고 말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맨 처음으로 떠오르는 연상작용이 'Shape up or ship out!'라는 속어였다. '일을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관 둬라' 하는, 인맥으로 얽히고 설킨 한국 사회가 아닌, 이 살벌한 실력위주의의 양키사회에서 당신이 평생에 한두 번 들을까 말까 하는 관용어다.
당신이 평소에 호감을 품으면서도 표현이 익숙하지 않아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금발의 양키와 오래 만에 동네 슈퍼 마켓 어느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그 놈이 'How is your business going, man?' (이 사람아, 요새 장사가 어때?) 하며 반색을 하며 치즈냄새를 풍기면서 말했을 때, 당신은 'It's shaping up! (잘 돼가고 있어!) 라고 폼나게 허풍을 칠 수 있는가. 이때 'shape up'은 모양새가 잡힌다는 의미다.
겉모습이나 외모를 뜻하는 'form'은 고대불어의 'forme'와 라틴어의 'forma'로 13세기 초부터 쓰이기 시작한 말인데 희랍신화에서 꿈의 신 'Morpheus'에서 유래한 단어다. 말기 암환자에게 고통을 멎게 해주는 강력한 진통제 모르핀(morphine)도 꿈의 신 모르페우스와 말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모양새라는 의미로서 이제는 완벽한 우리말이 돼버린 폼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꿈이 깃들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쉐이프' 보다는 '폼'을 선호한다.
이쯤 해서 논리의 비약을 하자면, 몽롱한 행복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폼생폼사의 삶에 도취한 사람 모습을 인생일장춘몽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불행한 사람은? '꼴이 말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지.
© 서 량 2010.09.26
-- 뉴욕중앙일보 2010년 9월 2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럼| 118. 소녀와 숙녀 (0) | 2010.11.01 |
---|---|
|컬럼| 117. 월요일, 월요일 (0) | 2010.10.11 |
|컬럼| 115. 아홉이라는 숫자 (0) | 2010.09.13 |
|컬럼| 114. 호칭이 무엇이길래 (0) | 2010.08.30 |
|컬럼| 113. 험악한 세상 (0) | 2010.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