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편은 기(氣)를 '기운 기'라 풀이한다. 기분(氣分)이 좋거나 나쁘다 할 때도 같은 한자가 쓰인다.
기분의 '분'은 '나눌 분'이니 싫건 좋건 다른 사람과 기를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근래에 '행복 바이러스'라는 유행어가 생긴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행복 바이러스는 감기처럼 공기로 전염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영어로 기분을 'feeling'이라 한다. 'feel'은 고대영어에서 '만지다(touch)'는 뜻이었고 그 보다 5,500년 전 경에 쓰이던 언어로 추정되는 초기인도유럽어로는 'feel'을 'pal'이라 했는데 '가볍게 때리다'는 의미였다.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파악한다는 뜻으로는 16세기 경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1930년대 초에 남녀간에 성적인 의도에서 서로의 '몸을 더듬다'는 뜻이 생겨났다. 당신도 알다시피 느낌이란 촉감의 결과일 때가 많다.
기운이 좋다는 것은 힘이 세다는 뜻으로써 힘이 공기에서 산출된다는 결론이다. 동양철학에서 유래된 우리말에 '기'를 빼 놓으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음양설의 음기와 양기 뿐만 아니라, 기세가 등등하고, 심기가 불편하고, 기력이 딸리고, 무슨 기미가 보이고, 기색이 역력하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고, 남의 기를 꺾고, 죽이고, 살리고, 어떤 여자는 화냥기가 있고, 기타 등등 예를 더 들자면 입만 아프다.
힘이 주먹 같은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나 표면적인 이해라고 당신은 다부지게 반박할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힘은 공기에서 나온다는 무게 있는 발언을 할 것이다. 기란 산소와 수소와 질소가 우글대는 공기(air)에서 나오는 법이지 절대로 깡패들이 애용하는 돌려차기 같은 운동이 아니라며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들지도 모른다. 뭐?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어떤 자음이든지 경음화(硬音化)시키면 좀 서늘(cool)하게 들린다. 그래서 '사랑해!'하지 않고 '싸랑해!'하면 더 '써늘'해지려나.
예술가는 '끼'가 있어야 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끼'는 '기'의 경음으로 순수한 우리말로 '된소리'라 한다. 소주를 '쏘주'라 하고, 자장면을 '짜장면'이라 발음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위에 언급한 화냥기도 '화냥끼'라 하면 훨씬 더 실감이 난다.
엊그제 월드컵 응원에서 붉은 악마들이 '오 필승 꼬레아' 할 때 꼬레아도 '코리아'의 된소리라고?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구려(高句麗)를 '꼬꾸려'라 하지 않았던가. 역설이지만 차제에 짜장면을 요새 표준어에서 자장면이라 연음(軟音)으로 발음하듯이 짬뽕을 '잠봉'이라 하면 또한 어떤가.
남자건 여자건 바람기가 있다는 말은 '바람 기운'이 있다는 뜻으로 매우 경건한 표준어다. 마음이 바람처럼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다니. 예술적이건 인간적이건 바람을 피우려면 우선 타고난 힘이 있어야 하려니. 그래서 요새 인기절정인 한국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인 탁구도 비가 내리기 전에 공기에서 미리 빗물 냄새를 맡는 천부의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던가. 선천적인 재능이 있어야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가 되느니라.
끼는 영어의 'talent'에 해당된다. 'talent'는 중세 라틴어에서 '성향'이라는 뜻이면서 '돈(money)'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talent'는 'toll gate (통행세를 내는 문)'의 '톨'과 그 말의 뿌리가 같다. 자본주의 사고방식으로 말하자면 끼 혹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란 부잣집 자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어떤 기운을 타고 난 것이다. 워낙 골골하는 체질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유능한 예술가도 못되고 바람도 안 피우는 모범시민으로 잔잔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지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드라마의 "명품" 주인공이 결코 될 수 없다.
© 서 량 2010.07.18
-- 뉴욕중앙일보 2010년 7월 2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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