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건국신화에는 동물이 잘 등장한다.
일연(1206~1289)이 세밀하게 묘사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만 해도 그렇다. 인간 세상에 뜻을 둔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삼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온다. 그런데 그가 기거하는 동굴에 며칠 후 곰과 호랑이가 찾아와 딩동! 하며 초인종을 눌렀던 것이다.
그 곰과 호랑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표명한다. 환웅은 신령한 쑥 한 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만 먹고 100일 동안 햇볕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 한다. 곰은 환웅이 시킨 대로 인간 여자로 변하고 성급한 호랑이는 '힘들어 못해먹겠다'며 동굴을 뛰쳐나온다.
웅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남자가 당시에 없었다. 그러나 맹렬여성인 그녀는 다시 환웅에게 특청을 들이기를 자기와 살을 섞어달라 했다나 어쨌다나. 그 정성이 하도 갸륵하여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모하여 웅녀와 시쳇말로 일을 저지르고 드디어 일정기간이 지나 옥동자가 태어났기로, 그가 바로 당신과 나에게 우리 배달민족의 씨앗을 영속시키는 단군왕검이시다.
로무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라는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는 이탈리아 로마의 건국신화는 또 어떤가.
전쟁의 신인 Mars(나중에 '화성'이라는 단어가 됨)가 성녀 실비아(Silvia)를 범하여 쌍둥이 아들을 잉태시킨다. 실비아의 삼촌은 세간의 소문이 두려워서 물색 모르는 두 쌍둥이를 숲 속에 버린다. 이들은 마침 또 뚝심 좋은 암늑대에게 발견되어 늑대 젖을 먹으면서 토실토실하게 자란다. 그 이태리의 건국신화를 표상하는 늑대 젖을 빨아먹는 쌍둥이의 조각을 당신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항시 출신이 묘한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법이다. 환웅은 물론 모세도 홍길동도 공자도 수퍼맨도 하다 못해 예수 같은 성인들도 마찬가지 케이스다. 당신과 나처럼 제대로 된 가정에서 겁도 없이 무난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세상을 잡고 뒤흔드는 명성을 획득하기는 이미 글렀다.
로무루스와 레무스는 서로 세력다툼에 빠져서 다투다가 결국 로무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로무르스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역사는 정보라기 보다 이야기다.
국가의 위상으로 치면 한국은 곰이고 이태리는 늑대다. 늑대는 노골적인 공격성을 발휘하는 짐승이지만 곰은 공격성을 감추고 내숭을 떠는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수곰이 암곰에게 구애할 때 큰 나무를 양손으로 흔들어서 자기의 힘을 간접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상대를 유혹하는 장면을 당신도 본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농담 비슷하게 어디에선지 읽은 글이 생각난다. 이태리안과 한국인들의 다섯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하늘이 아름답고, 둘째 물맛이 좋고, 셋째 모든 것이 가족 위주이고, 넷째 두 민족 다 마늘을 즐겨 먹고, 다섯째로는 여자들이 그다지도 여자답단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이태리 영화와 한국 드라마에서는 왜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밥을 같이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지. 그리고 모든 가족회의는 밥상머리에서 나오고 의사일정을 진행하는 사람은 대개 완강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다.
'family'는 15세기 초에 생겨난 라틴어 'familia: 가족'이라는 뜻과 동시에 'famulus: 하인'이라는 뜻도 있었다. 당시의 이태리에서는 혈연관계가 없이 집에 함께 기거하는 '도우미'를 가족 대우를 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말의 가정(家庭)은 '집 가'자에 '뜰 정'자이니 집과 정원만 덩그러니 있는 구조를 뜻한다. 하인이 흘리는 인간의 퀴퀴한 땀냄새가 나지 않는다. 동양적인 가정은 혈통과 격식을 위주로 한다. 어원학적 측면에서 우리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형식위주의 예절 바른 집단이다. 우리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인간관계에 얽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서 량 2010.07.04
-- 뉴욕중앙일보 2010년 7월 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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