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9

슈만을 상상하다 / 김종란

슈만을 상상하다 김종란 텅 비인 마음이 있었다 바람도 머물지 않는 공간에 활을 그으며 운지하며, 눈짓과 화음으로 찰나를 달리는 손 등을 구부리고 주저앉은 후미진 곳 음악이 찾아와 흐른다 정신의 황홀과 불안 사이 징검다리를 걷던 그, 우리 곁으로 눈을 감고 슈만의 음악으로 들어가 이 불안과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 그에게 빛 속에서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슈만 그의 음악에 자맥질하다 취하여 날개를 단다 징검다리를 건넌다 어둠 속 그는 울고 있다 이 지극한 어둠을 내리긋는 바이올린의 활 천상의 뛰노는 음 © 김종란 2021.06.03

정적 / 김종란

정적 김종란 맑고 파란 정적(靜寂) 물방울 소리 들린다 드러난 심장 정적은 숨쉬고 있다 정적은 쏟아진다 눈 내린다 어두운 숲 듬뿍듬뿍 지워 버리는 흰 페인트 눈 내리는 숲, 숲의 노루처럼 나의 근심이 지난다 총알 보다 빠르게 꿈인듯 뛰놀다 간다 소리 없는 거미집 빛이 일렁이며 놀다 간 반짝이는 그물, 가득 주름잡힌 마리아 테레사의 얼굴이 치마끝에 흰 페인트를 묻히며 캄캄한 골목에 접어든다 © 김종란 2021.05.25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물방울 하나로 / 김종란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물방울 하나로 김종란 마티스의 마지막 무렵 그 단순 명쾌한 선, 순수한 빛의 색에 번지다 수많은 길을 걸어 오며 목격한 세상의 아름다움 그 무게에 기대어 물방울 하나로 웃으며 남프랑스, 소리를 머금어 버린 푸른 공기에 스며든다 비안개에 파묻히는 니스에서 물기로 머물다 흰 페인트 내리 붓는 햇빛에 들어가서 일몰의 앙티브 해변, 반짝이는 빛이다가 어두운 파도와 함께 바다가 된다 마티스의 묘비에 돌을 놓는, 그 투명한 순간 * 마티스 묘지 방문객들은 조그만 돌을 주어서 그의 묘비에 올려놓는다 (사랑, 경외감으로) © 김종란 2021.05.16

봄빛 / 김종란

봄빛 김종란 봄의 자취, 어룽지며 유장하게 몸을 흔드는 5월 나무의 춤, 한계에 다다른 높은 음 새들이 곤두박질치며 노래하는, 나뭇잎 사이 출렁이는 봄빛, 베토벤 피아노 곡 심장에 파고 들듯 봄은 즈려감은 눈으로 연주되다 intermission time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는 멈추고 초록이 되려는 녹색 풍경 지속되며 봄은 활을 높이 든다 빛과 함께 상승하는 그의 비밀 오래된 전락을 위하여, 그를 바라며 추락하는 무지개빛 눈 찰라에 저무는 눈 지그시 바라보며 *maestoso로 연주한다 *장엄하게 © 김종란 2021.05.14

밤을 걸어나가다 / 김종란

밤을 걸어 나가다 김종란 검푸른 탐조등이 가르는 빛과 어둠 사이 흔적으로 쟁반에 받쳐든 열대 과일, 머리에 꽃을 꽂은 타히티 여인들 고갱이 받은 것들, 흔적으로 한 마리 고양이 대낮에서 밤으로 숨어 들어와 어두워져 선명한 기억에 촉수를 뻗으며 뒤척이는 흔적으로, 걸어 나가기 발자국 소리 내지 않으며 스쳐 지나가듯 고양이의 눈으로, 대낮인듯 © 김종란 2021.05.10

어두운 미소 / 김종란

어두운 미소 김종란 어두운 호수에서 떠오르는 첫 물결 밤은 점점 어두워져 깊은 숲이 어느덧 잠기고 하늘이 하늘만큼 서서히 들어앉은 품어 보기에는 어려워서 숨 들이키다 통증이 시작되는 가슴 한편 함께 어두어져 물 밑으로 물 밑으로 나의 무게 만큼 가라 앉으며 숨 쉬는 것을 잊고 물결이 된다 소리를 듣는다 숨 죽인 곳에 살며 deep blue가 된다 © 김종란 2021.05.08

언어의 새벽 / 김종란

언어의 새벽 김종란 날개의 끝 출렁이는 생각의 끝 재즈의 도입부가 흐르며 4월 비의 새벽,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을 연다 틈틈 연하고 부드러워 새순들, 빗방울들 초록안에 스미듯, 부여 잡은듯 흔들리지 날개의 끝은 어딘가 사람은 사람대로 연 하늘에서 눈 깜빡일 새 물기로 흔들리며 줄 서는 언어들 빗방울과 언어, 재즈의 빛으로, 하늘에 끝없는 구름장 날개를 편다 이 물기로 된 날개를 © 김종란 2021.04.23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의 자두 / 김종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의 자두 김종란 괘종시계 소리 들려요 어느 곳을 가든지 묵중하게 아주 가까이 몸 안에 듬직하게 자리 잡는 둔중한 시계 소리 차고 달콤한 자두를 건네 받으며 콘크리트 문을 열고 나가요 차게 서리는 물기로 끝없는 회색 문들을 바라보며 차고 달콤한 자두를 한입 베어 물어요 웃음을 터트리며 괘종시계 안에서 *미국 뉴저지 출신 의사 詩人 © 김종란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