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9

여름과 가을 사이 / 김종란

여름과 가을 사이 김종란 카드보드에 선을 긋고 자를 대고 craft knife로 자르면서 잘라지는 실체를 바라본다 흰 카드보드가 반으로 나뉜다, 소리 없이 뭉치들이 잠시 매달리다가 떨어지네 Spring film festival 지나 Summer film festival 공기가 점점 투명해지는 늦은 오후 도시의 햇살에 갇힌다 Festival이 끝난다 달콤한 향기 머무는 영화관, 아직 음악이 흐르고 있네 © 김종란 2021.08.03

불쏘시개 / 김종란

불쏘시개 김종란 캘리포니아 여름 산불 손사래치는 춤사위 후미진 숲길 바람결에 그녀는 묻는다, 나? 홍수의 범람으로 물살이 솟구치네 매운 연기로 젖어 드는 하늘 숨 쉴 수 없어 푸르른 얼굴로 힘껏 팔을 벌린다 보이지 않는 포옹으로 불길을 끌어안는 순간 우르르 무너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향기를 풍기는 그녀 의식의 흐름이 뚝뚝 끊어지는 무용수, 꿈속 숲을 뛰어다니며 잦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 나? © 김종란 2021.07.31

Summer Guest / 김종란

Summer Guest 김종란 여름 숲 물고기 진초록 나뭇잎 사이 순식간에 넘나드는 여유로움 명상에 드는 눈 깜빡이지 않는 눈 여름 바람결 물결처럼 타오른다 검푸른 초록에 잠기고 잠기면서 활짝 뜨는 눈 마음 가득 범종 소리를 담은 채 여름날 온몸 바람에 드러내는 이곳 이 순간 멀리 떠나는 풍경 소리 숲 속에서 나뭇잎과 함께 춤추며 여름바람 더불어 깊이깊이 자맥질하면서 초록 불붙는 여름날 물기 가득한 나뭇잎 초록 빛으로 타오르다가 여름 숲 눈 떴을 때 이곳 이 순간 멀리 보내는 풍경 소리 물고기는 깨어 있어 당신을, 숲을 껴안는다 © 김종란 2021.07.16

아버지의 비단잉어 / 김종란

아버지의 비단잉어 김종란 아버지 떠나신 후 머무시던 곳에 갔는데 흰 발을 가진 낯선 고양이 오랜만이다 하는 커다란 눈으로 잠잠히 전한다 단정한 모습 비단잉어와 함께 길을 나선 아버지 소식을 듣는다 마지막 시간 아버지와 함께 그는 이 꿈에서 깨어 나고 싶었을까 모두 잠든 밤 춤추듯 뛰어오른 비단잉어 아버지는 그의 귓전에 무슨 말씀을 들려 주셨을까 낮과 밤 연못가를 지나시던 아버지 내민 손을 툭툭 치면서 비단잉어는 마음에 가득한 무슨 말들을 했을까 © 김종란 2021.07.05

흰 토끼 이야기 / 김종란

흰 토끼 이야기 김종란 흰 토끼를 만났지 토끼를 품에 안고 들판을 걸었어 끝없는 여름 건너편으로 토끼를 놓아준다 나도 모르게 나는 한 마리 토끼, 세상이 온통 흰 구름으로 덮여 있네 토끼가 아닌 것이 없어 세상에 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 나무의 키가 자라는 속도를 기록한다 눈금을 새겨 놓으려 해 세심하게 흰 토끼 순간, 시간을 뛰어넘어 들판 밖으로 사라졌어 © 김종란 2021.07.01

푸른 웃음 / 김종란

푸른 웃음 김종란 조그만 트럼펫을 닮은 꽃 나지막한 가을 언덕에 보라색 푸른색 꽃들이 피어 있어 그 중 하나 내게 와 눈물을 머금은 채 푸르게 흔들리고 있어 웃음 속에 푸르름을 감추고 *앨런 긴즈버그의 언어를 뛰어넘어 지옥의 신기루를 넘나들어 고개를 기웃거리며 나를 들여다보고 있어 조그만 트럼펫을 닮은 꽃 에밀리 디킨스의 시에 나오는 gentian, 용담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어 * 비트 세대의 시인 © 김종란 2021.06.26

Summertime / 김종란

Summertime 김종란 속눈썹을 껌뻑거리며 적당히 기댄채 엇비슷 시선이 교차하는 오후 낮게 허밍하며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 줍는 구부러짐 부드럽게 한번에 휘는 곡선으로 발을 감춘 청남빛으로 물이 쏟아지듯 휘어지는 눈이 부신 *알제의 태양이라든가 깊은 나무 그늘에 숨겨진 피아노라든가 한데 어울려 느리게 **사라방드 춤 추듯 청록색으로 번지는 나무의 품 2B 연필로 창문을 그린다 여름의 열기 한겹 두겹 두텁게 초록보다 진하게 침묵보다 무겁게 쌓인다 미동도 하지않고 나무는 여름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래전 인화된 사진이 클로즈업 되듯 창문엔 연필로 스케치한 바람이 가득하다 * 까뮈의 '이방인'에서 ** 느리고 우아한 스페인 춤곡 © 김종란 2021.06.21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 김종란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김종란 *Vincent 나는 당신의 잘라진 귀를 갖고 있어 봄의 미열을 앓으며 당신 손을 잡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 사람을 서투르게 사랑한 사람 사람을 사랑하려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꽃이 피어나는 미열을 앓다가 4월의 사과꽃으로 지금도 피어있는 사람 노란색으로 칠한 방에서 그 낡은 의자에 머리를 감싸고 앉아 고통스러워 지금도 당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 나는 당신의 잘라버린 귀를 갖고 있어 그건 진짜야 반짝이는 모래알같이 이제 이 세상에 남겨져 있어 찢겨져 상처가 벌어지면 숨을 잠시 고르며 그 고통을 바라보는 거야 하얀 캔버스에 보라색 아이리스가 피어나는 거야 * Vincent Van Gogh © 김종란 2008.07.28

*일각수의 흰 뿔 / 김종란

*일각수의 흰 뿔 김종란 박물관 깊숙히 어두운 조명 아래 내비치는 너의 흰 뿔 내게로 와 그 흰 뿔이 자라나 협곡 깊이 자리잡은 푸른 돌들의 형제로 와서 신화의 음률, 낮은 울타리가 된다 유월의 **하얀 리본 나무 폭우 속에 내 마음의 비도 그쳐 하얀 리본 나무 음악의 문 소리도 없이 열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나의 기타에 비스듬히 기댄다 너의 흰 뿔은 어둠 속에서도 평화와 신비의 빛 멈춘 시간 그 곳에 멈춘 신화 낮게 더 깊게 연주되는 사파이어빛 음률 유월을 지나는 하얀 리본 나무 *The unicorn Tapestries (Cloisters museum) ** Cornus Kousa © 김종란 2021.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