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9

휘어지는 시간 / 김종란

휘어지는 시간 김종란 휘어지는 나뭇가지, 휘어지는 시간 휘어지는 길, 뜨거운 Singapore 햇볕에 싱싱하게 휘어지며 반짝인다 *사영, 그림자 너머의 시간으로 손을 뻗는다 **초끈으로 매달려 흔들리는 열린 시간 차원의 문을 열고 열고 또 여는 타임 트래블 꿈을 꾼다 시간을 뒤섞으며 눈을 크게 뜨고 손으로 입을 막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시간의 문을 닫는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는 사영(그림자)만 보고 있다는 철학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 우주를 10차원 시공으로 보는 이론 © 김종란 2022.01.27

폭설 / 김종란

폭설 김종란 눈이 내렸다 나는 눈이 내리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랑이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동안 나는 깜깜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새벽 창문을 열고 폭설에 갇히는 꿈을 꾼다 지나가는 사람 가두는 폭설 소설가 김지원을 생각한다 수제품 소설 '폭설'을 보며 한권 다 카피 하다가 고장 났다던 친구의 제록스 기기를 생각한다 과부하 카피의 과부하 넘쳐나서 멈춰버리는 사랑 폭설을 꿈꾼다 눈이 푹푹 내려도 상관없는 깊은 산 산사에서 고장난 제록스 기기를 생각한다 시작노트: 밤새 빛 잃어 어둠에 머물다 새벽녘, 폭설을 만났다. 소설가 김지원, 채원은 20대 부터 소리없이 걸어오는 흰 눈길 같다. 나 혼자구나 하고 둘러 볼때 그들이 먼 빛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고유의 빛을 발하며. 마치 ..

젖은 소매, 젖은 뺨으로 / 김종란

젖은 소매, 젖은 뺨으로 김종란 높은 산에 오르면 잠시 구름 안에 머문다 젖은 소매, 젖은 뺨으로 영혼의 밀도가 달라졌을 때 보는 신기루 바다 위나 사막에서 만나는 신기루 컵 안에 잠시 든 신기루, 눈물 범벅이 된 눈, 금싸라기 별들, 유리컵의 차가움과 뜨거움, 유리컵 안의 돈키호테와 산초, 초승달 코 끝 찡한 밤 공기를 타고 예쁜 판화 소책자로 만난 작은 사람들, 돈키호테와 산초를 사랑한다 돈키호테와 산초로 자라면서 만나는 신기루 늠름한 산초와 돈키호테, 늠름한 풍차 신기루에 잠시 머물며 미소를 증여 받는다 꿈과 풍차를 넘나드는 빛의 춤사위 신기루에서 신기루로 아스라한 절벽에서 절벽으로 © 김종란 2021.12.06

움직이는 역(station) / 김종란

움직이는 역(station) 김종란 살아 움직이는 말(언어) 눈 깜짝 할 사이 밤이 온 마음 울타리 넘는 은하수다 언어의 역전이 당당하게 불확실하게 서있다 눈빛 턱수염 역장의 미소가 신비롭다 *달리의 구부러진 시계, 확연하게 시간 너머에 서있는 언어의 역 당신의 지금을 지켜 보는 언어의 눈 시간과 공간에서 말의 속도에서 멀어지는 기차, 다시 몸을 숨기는 역 그 찰나 사람의 말은 태어난다 부러진 가지에 새 순, 소리 간직한 깊은 눈빛 하나 *Salvador Dali –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 김종란 2021.12.02

*프러시안 블루 / 김종란

*프러시안 블루 김종란 커다란 귀 접고 이야기의 숲, 공터 너와 지붕 아래 드는 깊은 잠 다 잠이 든다 햇빛도 숨 들이쉬고 잠잠하다 살아있는 것은 고요하다 환하게 어둡다 잠에서 깨어나면 깊은 바다 프러시안 블루 파랗게 젖은 몸 빠져나가는 초록색 석양이 밟고 가는 수면 위 반짝이는 이야기들 *Prussian Blue: 진하고 산뜻한 남색, 감청색 © 김종란 2021.11.03

바람의 기타(Guitar) / 김종란

바람의 기타(Guitar) 김종란 케이블카 위에 구름이 흐른다 케이블카 지붕 위에 기타를 안고 있다 바람은 기타를 울려 본다 내 서툰 연주 덮으려 연주를 한다 바람이 밀어다 올려 놓은 케이불카 지붕위에 위태위태 흔들리며 선다 기타를 껴 앉는다 오후 4시와 5시 사이 허드슨 강이 무겁게 흐르고 엿가락 같이 끈적하고 기인 길도 터벅터벅 들어 온다 비 개인 숲속에서 자라나 뛰어든 폭포 이미 끝자락 푸르고 희게 웃으며 떨어진다 붐 비는 도시 어두운 길에 화투짝처럼 떨어져 있다가 바람에 휘몰려 지붕위에 날아 오른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맨해튼 어느 지붕 위에서 서툴게 기타를 친다 젖은 신발 벗지 못한 채 지니고 온 때 묻은 배낭에 기대어 보다 못한 바람이 나의 기타를 울린다 여러 길을 걸어와 잠시 머물다 일어서야..

겨울사람 / 김종란

겨울사람 김종란 겨울사람은 언저리에 닿고 싶다 담배를 태우면서 화면 가득 노래 부르는 샹송가수 그 부드러운 미소 거침없는 커다란 눈과 입 살아있으므로 닿을 수 있다 이제 겨울 한 가운데서 수프를 끓이면서 보내는 시간 겨울 밤 불빛들은 가슴 언저리 꽃처럼 머물다 간다 추운 것을 함께 견디려 하다가 짐짓 더 추운 것을 서로 덤으로 얹어 주면서 겨울사람 하나 영화속으로 들어가고 샹송가수는 걸어나와 수프를 끓인다 겨울사람 영화속에서 커피잔 언저리 살짝 두드리며 입술에 와 닿았던 향기의 소소한 부분을 불러낸다 칼로 말을 자르는 추운 부엌에서 샹송가수는 부드럽게 노래를 불러준다 남겨진 겨울사람에게 © 김종란 200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