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 최덕희 갈볕은 인색하기만 하다 된서리 내린 뜨락에 뒹구는 낙엽마저 녹아내려 질펀한데 가지 끝에 매달렸던 과일들이 미처 익어가지도 못하게 겨울이 자꾸 언 발을 디민다 온난화현상으로 지구는 땀을 흘리고 해가 갈수록 체감온도는 떨어져 철새도 길을 잃고 헤매인다 몇 닢 매달은 단풍나무는 밑둥을 돌..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1.04
마음 먹기 달렸다 세상은 / 최덕희 눈을 비비고 보면 저만치 비켜 서서 손을 내밀어 움켜 쥐면 빠져 달아나는 마음대로 안되는 세상 빛에 드러난 세상은 보이는 만큼 뿐 근시안경으로 보다 멀리 원시안경으론 촛점을 당겨 닿을 수 있는데까지 닿아 마음먹기 달렸다 세상은 때론 눈을 감자 어둠 속에 선연해 지는 보지 못하던 것들의 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1.04
길 장(葬) / 최양숙 길 장(葬) 최양숙 세상의 급류에서 튕겨나와 찻길 옆에 던져진 야생의 회색 털짐승 태엽이 모두 풀린 무너진 꼬리 위로 비가 내린다. 질주하는 차들은 속력도 그대로 힐끗 일별이나 할까 바퀴가 굴린 바람이 털끝을 조문한다. 돌 언덕 위 나뭇가지 진저리치며 빗방울을 뿌릴 때 숲의 정기를 나누던 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1.01
비 갠 오후 / 윤영지 비 갠 오후 윤영지 지난 며칠 줄곧 비가 내리더니 하늘이 퀭하니 뚫렸다 빼곡히 차있던 황금빛 가을 물결이 후두둑 젖은 땅 위로 내려앉아 출렁이고 저만큼 더 보이는 하늘 바라보며 나도 이제는 묵직한 걱정을 사뿐한 나뭇잎으로 내려놓는 법을 배우려 한다 드러내는 나무들의 순리와 조용한 당당함..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0.30
자각몽* / 송 진 자각몽* 송 진 평범한 일상이 낯설 때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 스핑크스의 낯선 숨결이 인디아나 존스의 동굴 끝 골방의 자물통 속으로 스며들면 낡은 시간들을 껴입은 채 단정히 삭아가는 문짝 불가마 속에서 식은 땀을 흘리는 파아란 봄 초승달의 허리를 한사코 껴안고자 안간힘 쓰는 구름 제 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0.17
매미 / 최양숙 매미 최양숙 매미가 운다. 말매미가 울고 참매미가 운다. 풀이 울고 나무가 운다. 한낮의 빈 동네에 성하는 것은 숲의 소리 여름날의 자궁에 차오르고. 땅에서 갇 올라온 굼벵이 어스름한 벌개미취 꽃밭에서 검게 물든 10년 세월을 벗는다. 허물은 머리를 쪼개고 이제사 눈을 뜨는 여리디 여린 속살 수..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10.12
적과 동거하는 법 / 송 진 적과 동거하는 법 송 진 놈들이 처음 내 영토에 침입해 왔을 때는 음습한 협곡에 진을 치고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틈엔가 확 트인 평지에까지 교두보를 구축하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먹장구름의 위세에 놀란 들꽃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잊었던 이름들을 불러 모은다 강초에 절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09.27
당신의 이 편에서 마주 보고 있을... / 윤영지 당신의 이 편에서 마주 보고 있을… 윤영지 수많은 독사진들 이 편에는 누구인가 서 있어 셔터를 열심히 눌러주었겠지 흘러가는 세월은 그저 무늬일 뿐 엄청나게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을 달콤한 바람결에 실어 하늘로 띄워보내는 찰나 사랑의 앵글로 “Pause!” 멈추어 그림 그려주는 그녀가, 왠지 그..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09.15
도라지 / 최양숙 도라지 최양숙 다섯모 초롱 안에 소롯이 담은 애닯음 흰 저고리 연보라 치마에 담긴 젊은날 어머니의 속살 향내 머금은 불밝혀 그 사랑 기다리다 한여름 뒷뜰에 내려앉은 한줌의 별무더기 흙속에 묻은 가슴 겨울 추위 석삼년 버티다 이제사 볕을보고 채반에 가지런히 맨몸으로 누워 꽂히는 햇살 고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09.10
망중한 (忙中閑) / 윤영지 망중한 (忙中閑) 윤영지 늦여름이 허리 펴고 드러누워 두 팔 기일게 늘이고 초가을의 문턱을 잡고 밀어붙이는 나른한 오후 날아드는 이름 모를 새, 파닥이는 깃털의 떨림이 한적한 오후 햇살에 얄팍한 파장을 일으킨다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서로 화답하며 바지런히 파아란 하늘에 선을 그린다, 고추 잠.. 김정기의 글동네/시 2009.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