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거하는 법
송 진
놈들이 처음 내 영토에 침입해 왔을 때는 음습한 협곡에 진을 치고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틈엔가 확 트인 평지에까지 교두보를 구축하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먹장구름의 위세에 놀란 들꽃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잊었던 이름들을 불러 모은다 강초에 절이는 수공법과 활활 달구어진 모래로 지지는 화공법을 병행해 보기도 하지만 막무가내다 마침내 놈들은 천혜의 요새를 확보하여 장기전의 진용을 갖추더니 시도 때도 없이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하며 괴롭힌다 관 속까지도 따라와 쑥쑥 자랄 것들
천신만고 끝에 작전을 바꾼다 용서하리라 화해하리라 잔잔한 기억의 입구를 열어주던 저 버드나무를 쓰러트린 바람의 횡포를 용서하리라 한낱 포구의 조약돌을 이승에서는 닿을 수 조차 없는 진주조개의 신화로 승화시킨 그 여름의 아침 파도를 용서하리라 그리고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안간힘 쓰던 무덤보다 난해한 그 표정과 화해하리라
하루에 한 번은 정성껏 목욕을 시킨 후 헤어 드라이어까지 동원하여 완전히 말리고는 빠진 곳 없이 골고루 로션을 입혀준다 지성이면 감천이랬지 더 이상 발광하지 말거라 음모도 꾸미지 말거라 나는 너의 선한 이웃이 되련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온유한 평화라고 읽는다
나를 쏘아보는 거울 속의 너에게 환한 웃음 한 번 날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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